피해자 코스프레
다음날 오전, 관리팀 직원들의 출장과 휴가가 겹쳐 사무실에는 정윤과 지혜만 남아 있었다. 이런 시간이 흔하게 있지 않은 관리팀이라 여유를 부리고 싶었던 지혜는 그날의 기사를 보며 정윤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기 보러 갈래?"
낙엽진 전주 한옥마을의 기사를 보던 정윤의 제안이었다. 전주는 어릴 적 학생 때나 가보고 가본 적이 없던 정윤이라 기사를 보고 즉흥적으로 마음이 동한 것이다.
"응?"
"당일로 가보자!"
"이번 주 토요일 어때?"
"이번 주? 당장?"
"응!"
지혜는 잠시 고민하다 금방 수긍했다. 때마침 단풍철이기도 했고 동료와 첫 여행이지만 당일치기 정도야 큰 무리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수화의 정윤에 대한 경쟁 심리에 불을 지폈다.
"그럼 기차표부터 보자."
수화의 속마음을 들었던 지혜는 점심시간이나 모일 일이 있을 때마다 수화에게 관심을 두었다. 외로움이나 소외감이라는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터였다. 관리팀끼리 티타임을 할 때도 수화에게 연락해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수화는 가도 되냐는 질문으로 한발 빼기도 했지만 지혜의 관심이 수화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그런 관심의 보답으로 수화는 지혜의 업무를 도왔다. 바빠 보이는 정윤에게 도움을 구하기 어려웠던 터라 수화가 손이 되어주자 지혜 역시 나쁘지 않은 관계였다. 잦은 교류로 수화는 지혜의 편한 진심을 듣곤 했기에 무엇을 해야 회사에서 지혜를 자신의 옆에 둘 수 있는지 본인의 역할을 알았다.
"정윤씨랑 전주 가는 거 계획 다 세웠어요?"
퇴근길, 정윤과 친구가 되고 싶은 지혜의 속마음을 아는 수화가 정윤의 얘기로 지혜의 관심을 끌었다. 지혜는 수화가 여행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마음에 걸려 머뭇거리긴 했지만 수화의 그저 궁금한 것이라는 말에 정윤과 나눈 일정에 대해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여행을 앞둔 금요일 늦은 오후, 정윤의 자리로 영업팀 직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윤씨,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사무실에 수화씨 없나요?"
"있어요.. 있는데.."
"근데 왜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모른다는데..?"
"...."
업무 흐름이 끊긴 정윤은 직원의 대답에 화가 났다. 정윤에게 종종 비슷한 전화가 걸려왔고 담당자로서 직접 배울 생각은 하지 않는 수화의 업무 태도에 여간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수화에게 메신저를 보내 해결책을 제시했다. 대답은 곧잘 했지만 정윤은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수화의 대답이 그저 회피성일 뿐 업무에 대한 책임감은 있는지 정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곤 했다.
그 주 토요일 정윤과 지혜는 전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당일치기였지만 정윤은 피곤함에 월요일 오전 휴가를 사용했다. 셋이 점심을 먹게 된 이과장과 지혜, 수화가 전주 얘기로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무난하게 관계가 유지되는 듯했다. 정윤은 오후에 출근해 업무를 마무리했고 퇴근길 밝아 보이는 수화와 아무쪼록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업무 마찰로 인해 수화에게 있었던 약간의 응어리는 여행으로 모두 털어내 수화를 마주하는 마음도 가벼웠다. 지혜는 수화와 집으로 향하며 업무 스트레스에 대한 얘기를 이어나갔다.
"아 정말, 짜증 난다니까?"
"그래?"
"응. 아 됐어. 그만 얘기할래. 더 얘기해 봤자 짜증만 나지 뭐"
"그럼 여행 갈래?"
"응?"
"거기 축제 가고 싶다며. 가자며."
"1박 2일로 가면 되지 않을까?"
"갑자기?"
"응. 지혜씨가 힘들어 보여서 가주고 싶어요.."
지혜는 수화와 가까워지면서 업무 외적으로는 항상 말을 놓았지만 수화는 섞어하곤 했다. 가까워진 수화에게 대화를 하다 가보고 싶은 곳을 종종 말하긴 했지만 막상 동료와 1박 하는 여행을 가기에는 불편했던 터라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기 싫어..?"
수화는 답이 없는 지혜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거기 축제 가고 싶다며.. 힘들어 보여서 리프레쉬 겸 가주고 싶은데.."
지혜는 수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가고 싶었던 축제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걱정해 주는 듯한 수화의 진심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자"
"수화씨랑 전주 가기로 했어요."
"응?"
수화와 이과장이 영업팀과의 일정으로 자리를 비워 지혜와 정윤이 점심을 먹다 전주 여행 얘기가 나왔다.
"전주를 또 간다고?"
"언제?
"다다음주에"
"수화씨가 내가 힘들어 보여서 가주고 싶다고 하더라고"
"응? 전주를 왜?"
"거기 그날 축제 하거든요"
"2주 만에 전주를 또 가?"
"그렇게 됐어요."
정윤은 수화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정말 지혜를 위해서일까? 아니라고 해서 자신이 개입할 일은 아니었다. 지혜와 수화의 관계일 뿐. 하지만 뭔가 미묘해지는 이 관계가 껄끄러워지고 있어 확인하고 싶었다.
"수화씨 질투하는 거 아냐?"
"응?"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갔다 온 다음에 전주를 가준다고 했다고?"
지혜는 정윤의 말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수화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윤은 수화의 그간 행동이 관계를 피곤하게 한다고 느껴졌고 지혜에게서 조차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짧아진 대답과 사적인 주제는 줄이고 필요한 업무 협조뿐이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정윤의 선택이었다. 워낙 무덤덤한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평소보다 더 반응이 없는 정윤을 느낀 지혜가 결국 직접 물었다.
"정윤씨, 무슨 일 있어요?"
"네?"
"무슨..?"
"근데 나한테 왜 그래요?"
정윤은 지혜의 질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평소 하던 인사와 대화도 짧아졌고 개인적인 얘기도 수화에게만큼이나 많이 줄였다. 망설이던 정윤은 지혜에게 수화의 질투가 피곤하고 이렇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얘기를 했다. 정윤 역시 모른 채 하기에는 스스로 많은 감정을 쓰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지혜는 정윤의 얘기를 듣고서도 그녀의 방식이 이해가지 않았다. 뭐가 문제지? 관계를 저버린 정윤에게서 오히려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정윤은 지혜에게 오늘 점심은 혼자 먹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이과장 역시 점심 약속으로 외출하였고 지혜는 수화를 불렀다.
"너 정윤씨 질투해?"
"네가 뭔데 질투를 해"
"무슨 말이야..?"
지혜는 수화에게 단독직입적으로 물었고 수화는 갑작스러운 지혜의 말에 당황했다.
"정윤씨가 그러던데, 전주 가는 거 네가 질투한 거라고"
수화는 누군가 자신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심연의 불안을 들켜 뒤틀린 마음이 올라왔다.
"정윤씨가 질투하는 거 아냐?"
수화는 정윤에게 의심을 되돌려주며 차가워진 마음을 안정시켰다. 정윤은 수화를 빤히 바라보았고 수화는 말을 아낀 채 고개를 숙이고 식당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그날 퇴근길에 수화는 정윤을 보고 바로 고개를 숙였다. 말하지 않은 부끄러운 마음을 꿰뚫어 보인 거 같아 수치심과 불편함이 같이 올라왔다. 그런 수화를 보고 이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정윤은 이유를 눈치채지는 못했다.
그 후 정윤은 아무렇지 않게 지혜를 대했다. 둘 모두에게 거리 두는 것을 선택한 것이 옳다 여겼지만 마음 같지 않은 상황에 무엇이 맞는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가버린 상황에 어쩔 도리가 없었고 한발 물러선 채 거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렇게 완전히 마음이 풀리지도 안 풀리지도 않은 채 여행을 다녀온 지혜가 정윤에게 선물을 건넸다. 전주에서 산 간식이었다. 정윤과는 일정이 짧아 사지 못한 간식을 지혜가 선물로 준 것이다. 정윤은 지혜의 호의가 고마웠고 이대로 아무런 문제 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점심시간마다 만난 수화는 말없이 앉아 자리만 채우고 있었고, 정윤과 지혜 역시 그런 수화를 의식하다 아무런 말 없이 그렇게 점점 불편한 시간만 가고 있었다.
"나 혼자 먹고 싶어."
점심시간이 불편해진 정윤은 한 번씩 지혜에게 혼자 먹고 싶다는 얘기를 하고 종종 자리를 떴다. 쉬는 시간마저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정윤이 없을 때면 수화가 말이 많아지자 지혜는 수화에게 한 번씩 핀잔을 주었다. 수화는 지혜가 핀잔을 줄 때면 정윤이 자기가 있으면 말을 하지 않는다며 되려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수화의 경쟁심이었지만 위축되어 보이는 수화에게 동정심이 느껴진 지혜는 수화에게 자의식과잉이라며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정윤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 번씩 영업팀 팀장과 정윤, 지혜, 수화 셋이 점심을 함께 할 때면 정윤이 영업팀 팀장과 사사로운 얘기를 많이 나누자 지혜는 수화에게 피해의식일 뿐이라며 핀잔을 다시금 주었다. 되려 정윤에게 어두운 심연을 들켜 수치심을 느낀 수화의 피해자코스프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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