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화 Nov 24. 2024

[연애소설] 6화 각자의 선택

끝이 보이는 관계

준희에게 주고 싶지 않은 감정이 슬픔이었던 정현의 다짐이 무색하게 그 시간은 바로 찾아왔다.


'타닥타닥'


준희와 정현 앞에 모닥불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준희와 정현은 모닥불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나 때문에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진 거 같네."


침묵을 깨고 정현이 멋쩍게 말을 건넸다. 거기에 준희는 입을 다문채 입꼬리를 올렸다. 준희는 정현이 이런 시간을 만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현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을 것만 같긴 했지만 이런 타이밍에 알게 될 줄은.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준희는 거두절미하고 정현의 얘기를 바로 듣고 싶었다. 좀 전의 상황에서 갑자기 선을 긋고 이렇게 자리를 만든 이유가 궁금했다. 준희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정현은 미사여구를 빼고 최대한 담백하게 마음을 전해야겠다 생각했다.


"나는 지금 암에 걸렸고 시한부야. 그래서 마지막 여행을 온 거고."

"다 받아들이고 온 상태라 그렇게 침울하진 않아. 그냥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싶어."


모닥불이 타오르는 것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준희는 정현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온 사람에게 위로를 해주는 것이 맞을지 그렇다고 잘 생각했다 받아치기에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거처럼 보일까 마음이 쓰였다. 대성통곡을 하기엔 우리 시간은 짧았고 덤덤한 척하기에는 눈가가 이미 촉촉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정현은 준희가 애써 눈물을 삼키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고인 눈물이 바로 떨어질 것만 같도록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정현은 침묵함으로써 준희에게 잠시 시간을 주었다. 숨기고 싶은 그 눈물을 마음으로 보았기에 보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나 남았는데?"


진정된 준희가 정현에게 물었다.


"그거야 뭐.. 의사도 추측이니까.."

"이렇게 다닐 수 있는 건 한, 두 달일 거 같아."

"약을 늘려야 하는 몸이 느껴지거든"


"약?"


"응, 진통제를 들고 다녀."


정현은 아침에 챙겨 온 약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준희는 그 약을 받아 들고 만지작 거렸다.


"많이 아파?"


"약 먹으면 괜찮아"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준희는 정현과 타코가게에서 먹은 맥주가 생각났다.


"어차피..."

"괜찮아. 시간을 잘 보내다 가고 싶으니까"


"여기 언제까지 있을 거야?"


"처음엔 한 달 생각하고 왔는데.."

"널 만나니 더 놀다 가고 싶어 졌고.."

"근데 조금 일찍 들어가야 할 거 같기도 해."


정현은 모닥불을 보며 얘기하다 준희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며 미소 짓다 다시 하늘을 보며 쓸쓸하게 얘기했다. 준희는 정현의 말에 캘리포니아에서의 모든 마음이 느껴졌다. 그 사이사이 준희 자신이 느낀 감정들이 모두 사사롭게 여겨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근데 그 얘기는 나한테 왜 하는 거야?"


준희는 정현이 선을 긋기 위해 해주는 얘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사정을 말해주지 않아도 거절할 수 있는 사이에 그가 선택한 솔직함이 궁금했다.


"그냥.."

"너한테는 하고 싶었어."

"내 마음이 그래."


정현은 준희의 마음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준희의 마음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그녀가 싫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상대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절을 하는 것이 준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정현답지 않게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마지막 욕심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준희다운 반응이었다. 이를테면 서서히 멀어진다거나 위로하며 선을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준희의 선택은 정현이 원하는 것을 맞춰주는 것이었다. 정현은 그런 준희에게 알았으면 이제 그만 가라며 아쉬움에 절절한 이별을 원치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잘 놀고 친구로 잘 지냈으면 좋겠어."


끝내 꺼내고 싶지 않은 '친구'라는 말로 관계를 정의했다. 정현의 방식으로 욕심을 부린 만큼 준희의 마음에 짐이 남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어쩌면 '친구'라는 관계로 준희를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준희 역시 마음을 소진할 시간이 있어야 미련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


준희는 털어내듯 대답했다. 준희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싶을 만큼 일찍 얘기해 준 정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금이면 멈출 수 있을 줄 알았던 마음이 어느새 이미 모두 젖은 채인 줄도 모르고.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질 때쯤 준희가 눈을 떴다. 밤새 악몽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뜨자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 한국에서 있었던 사건 후, 간혹 꿈에서 헤매다 눈을 떴었는데 캘리포니아 와서는 처음이었다. 물에 젖은 듯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아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하.."


짧은 숨을 내쉬고는 냉장고로 가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차려지는 듯했다. 창문을 열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숨을 깊게 내쉬고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확인했다. 은영의 카톡이 와 있었다.


"은영아~"


"준희야! 지금 일어났어?"


"응. 한국은 저녁이지?"


"응! 6시야, 저녁 먹으려던 참이었어."

"떡볶이 시켰어. 먹을 때가 됐거든"


"푸하하"

"잘했어~ 은영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응~! 너는 밥 안 먹어?"


"땡기는 게 없네"


"뭐라도 먹어야지~! 나라면 여기저기 나가서 맛있는 거 먹을 텐데!"


"그냥 조금 있다가 배고프면 먹지 뭐."

"주말인데 데이트 안 했어?"


"오늘 일이 있다고 해서 하루종일 집에 있었어"

"거기서 친구 좀 사귀었어? 그때 말한 한국인은 어떻게 됐어?"


"아, 정현이?"


"정현이~~?! 이제 이름 부르는 사이가 된 거야?"


준희는 며칠간 있었던 정현과의 시간에 대해 은영에게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상태가 간사한 것 같다는 솔직한 심정도 털어놓았다. 준희가 얘기한 정현의 사연이 은영도 조금 놀랍기는 했지만 언제나 준희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였던지라 준희가 안심할 수 있게 조언해 주었다.


"준희야, 다 그런거지 뭘. 정현의 사연은 안타깝지만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네가 가족은 아니잖아.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네가 해줄 수 있는 것만 도와주자~ 네가 막 지금 절절하게 굴잖아? 그럼 오버야 오버."


"응..."


"다음에 보여줘! 영상 통화하자!"

"아, 한국 언제 들어와?"


"모르겠어. 아직"


은영과의 전화를 끊은 준희는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정현이 차를 렌트해 그리피스 천문대에 놀러 가기로 했다. 처음 캘리포니아에 오기로 결정했을 때 관광의 목적은 없었지만 정현과 얘기하면서 라라랜드 얘기가 나와 그리피스 천문대에 가기로 한 것이다. 미국에 오면 한 번씩 보고 간다는 할리우드 싸인이 잘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정현이 데리러 오기 전 간단히 짐을 꾸리려 준희는 일어나 한국에서 끌고 온 캐리어를 열었다. 옷은 다 꺼내 정리해 둔 상태였지만 잡동사니는 캐리어에 그대로였다. 바닥에 캐리어를 펼치고 앉아 일회용 카메라를 만지작 거렸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시간을 남기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카메라였다. 친구인 은영이 가져가보라고 준 것이었는데 그동안은 귀찮기도 하고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정현에게 사진을 남겨주는 것이 의미가 있을지 우리의 사진을 남기는 것이 좋을 것인지 고민이 들었다. 일반적이라면 신나게 찍고 놀았을 테지만 준희에게는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고민이 깊어지자 생각의 꼬리를 끊으려 그대로 일어나 샤워를 하러 갔다.


이전 05화 [연애소설] 5화 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