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정의
준희의 눈에 그는 한 번씩 다른 생각을 하다 오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즐거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묻은 정현의 표정이 준희의 마음을 한 번씩 찌르는 듯했다. 원체 사람의 표정을 잘 보는 준희인지라 그에게 무슨 생각하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직 그의 진짜 속마음을 묻기에는 우리의 관계가 가볍다고 여겼다. '좋다'고 말하는 그에게 좋은데 왜 슬퍼 보이냐고 되묻기에도 실례인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사정이 있고 물론 나조차도 그 어떤 사정을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니까. 어쩌면 내가 먼저 정현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정현에게 나의 짐을 내려놓으면 나도 그의 짐을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호텔 어디야?"
준희는 만족스러운 타코 식사를 끝내고 정현이 묵고 있는 숙소 위치를 물었다. 정현이 말한 자전거를 빌릴 계획이었다.
"자전거?"
"금방이야. 퍼시픽시티 쪽으로 가면 돼"
준희는 정현과 걸으며 그와의 간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따스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었다.
"근데..뭐 물어봐도 돼?"
"뭔데?"
"직업이 뭐야?
"풉"
"왜 웃어!"
준희가 정현에게 물었다. 준희야 이미 쉬고 있는 무렵에 장기간 여행을 온 것이지만 정현은 어쩐 일로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을 온 것인지 궁금했다.
"회계사"
"지금은 쉬고 있어"
"아~ 똑똑하구나?"
"머리 아프지"
"지금은 그냥 쉬는 거야?"
"회계사면 언제든지 마음대로 다시 일 할 수 있는 건가?"
".."
"..?"
"왜~ 그렇잖아, 아무래도 한국은 경력이 끊기면 다시 일하기도 어렵고."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정현의 앞머리가 날리고 그의 표정은 애매모호했다.
"너는?"
정현의 표정이 풀리더니 준희에게 물었다. 준희는 한국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했고, 지금은 잠시 휴식기로 문을 닫고 온 상태라고 얘기했다. 휴식기를 가진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한국에서의 일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 정현에게 거리가 느껴져 준희는 자신이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앞서 나갔나?'
"서점은 어때?"
"나도 다시 직업을 고르면 그런 거 하고싶어."
"그냥 잔잔하게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거"
"회계사는 너무 바쁘고..머리 아파"
"서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하. 그렇기는 하겠지"
"그럼 한국가면 다른 거 하고싶은 거 하지 그래!"
"아무것도 안할래. 그냥 너랑 놀래"
갑자기 대화톤을 바꾸며 장난스럽게 건네는 정현의 말에 준희는 온 몸이 붉어지는 듯 했다.
"뭐야. 너 선수야?"
애써 긴장된 마음을 감추며 살짝 상체를 뒤로 빼고 정현에게 되받아쳤다. 정현은 준희의 말에 소리내 웃으며 그녀를 한번 보고는 앞을 보고 걸었다. 그의 팔을 잡고 걷고 싶었지만 준희는 아직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냥 잡을까'
정현의 호텔에 도착해 준희는 잠시 밖에서 기다렸다. 정현이 자전거를 한대 먼저 끌고 와 기다리라며 한대를 더 끌고 왔다. 준희가 자전거를 타고 앞서 갔다. 그 뒤를 정현이 따랐다. 그녀의 날리는 머리칼이 정현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듯 했다. 그녀에게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을까. 여행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핑계 삼아 모든 걸 털어내어볼까. 한국에 돌아가서 그녀를 보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내 정현은 준희에게 슬픔은 주고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이 순간을 즐거운 추억으로만 남겨주고싶었다. 몇년이 지나 떠올려도 그때 좋았지, 좋은 사람을 만났었지 하고 떠올릴 수 있도록.
해변가를 돌다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는 곳에 준희가 자전거를 세웠다.
"여기 구경할까?"
준희를 따라 자전거를 세운 정현이 물었다.
"그러자!"
자전거를 끌며 마켓을 구경하다 정현이 서핑보드 모양을 한 은색 목걸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이거 어때?"
"오"
"근데 서핑도 안하잖아."
"헌팅턴비치를 상징하는 거지."
"너 마음대로?"
"응. 내 마음대로"
"파하하"
"기념으로 하나 살까?"
준희도 서핑보드 모양을 한 은색 목걸이를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현이 그 새 목걸이 두개를 결제하고는 그녀에게 하나 건넸다.
"나 주는 거야?"
"한국 가서도 내 생각하라고"
"한국 가면 나 안보려고 했어?"
가볍게 던진 정현의 말에 준희는 살짝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어? 보고싶지."
준희의 되물은 말에 정현은 심장이 아렸다.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지만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준희와 더 깊어지기 전에.
"이건 우리가 이 넓은 땅에서 만난 기념품이야. 다른 의미 없어."
준희와 자전거를 나란히 끌고 가며 정현이 얘기했다.
"누가 뭐래?"
"나니까 착각 안하지, 이런 거 막 커플로 사주고 그러지마"
"오해한다고"
누가봐도 관심의 표현인 선물이었지만 준희의 말 그대로 정현은 자신을 기억할 무언가를 남겨주고싶은 마음에 선물을 한 것이 그의 의도였다.
"너는 여행 갈 때마다 이렇게 기념품 나눠가져?"
"너 혹시 여자친구 있어?"
잠시 들떴던 자신이 초라해져 준희는 정현에게 심술을 부렸다. 자기가 본 정현이 혹시 착각일까, 혹시 자신의 상황이 눈을 가려 바람둥이한테 홀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갖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준희의 마음이 무엇인지 느껴졌기에 정현은 해줄 말이 없었다. 사실은 준희와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터였던지라 당연한 수순이라면 이것은 그녀와 데이트이고 연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지난 38년간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쁜 놈이 아니라면.
앞서가는 준희를 따라 정현이 조용히 뒤따랐다. 그의 호텔에 다달았을 때는 해가 넘어가고 있어 해변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정현이 자전거를 반납하고 준희에게 다가갔다.
"비치에 모닥불 피우는 데가 있던데 갈래?"
정현은 자신의 얘기를 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에 대한 마음은 이르다 여기지 않았기에 말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준희는 가만히 서 있다 그의 물음에 입술을 다물며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