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유예
아침 일찍 일어난 정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써 단장했다. 준희를 보러 가기 위해. 준희가 카페로 내려오지 않거나 준희가 숙소에 없을 거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난 모든 우연들이 우리의 운명을 당연히 여기게 했다.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카페에서.
정현은 준희의 숙소 일층 카페에 도착해 커피와 토스트를 주문했다. 약도 하나 챙겨 왔다. 그녀가 보지 않을 때 먹으면 되니까. 어제처럼 그녀와 아쉽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토스트를 다 먹어갈 때쯤 준희가 내려왔다. 어제와는 조금 다르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머리는 가지런히 빗어져 있었고 선글라스는 머리에 얹어 있었다. 옅은 미소를 띤 표정도 꽤나 생기 있어 보였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또 보네요."
준희가 정현을 발견하고 놀라자 정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준희는 반가웠지만 부담스럽게 느껴질까 혹은 자신이 쉬워 보일까 애써 감정을 누르고 인사했다. 준희의 마음은 이미 가지런히 빗어진 머리에서 드러났다. 평소였으면 다 말리지도 않은 머리를 털며 커피 마시러 내려갔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빗은 머리로 내려갔다.
"여기 좋아하시나봐요."
"어제 여기서 마셨더니 좋더라고요."
준희는 당연하게 정현의 테이블 의자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정현은 어제와 비슷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같은 향이 나고 있었다. 바람에 한 번씩 흘려오는 정현의 향이 준희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정현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침이에요?"
정현이 먹고 있는 토스트를 보고 물었다. 어제 준희가 먹었던 것과 같은 메뉴였다.
"네. 간단하게 먹고 싶어서요. 커피 마시려고 내려온 거예요?"
"아, 네."
준희는 주문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것을 알아채고 바로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메뉴를 주문하고 계산대에서 서성이다 커피를 받아 정현의 테이블로 갔다.
"오늘은 뭐 할 거예요?"
"계획 없이 온 거라 특별한 일정은 없어요."
"서핑 좋아해요?"
"서핑은 안 해봤어요."
"아직은 그냥 눈으로 보는 게 좋네요."
"푸하하, 저도 그래요."
"왜 여기에 숙소를 구한 거예요?"
"그냥 따뜻하고 느긋한 데서 좀 쉬고 싶었어요."
"정현씨는요?"
"아, 나이가 어떻게 돼요?"
"실례인가."
"86년생이에요."
"이제 한국도 만 나이를 쓰니까 연생으로 얘기하게 되네요."
"파핫,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근데 우리 동갑이네요?"
"반가워."
준희는 자연스레 말을 놓으며 손을 내밀었고 정현은 눈을 마주치며 손을 잡았다 바로 놓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준희의 손이 부드럽고 말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현 역시 남자 손 치고 꽤 부드러운 편이었고, 준희는 정현의 손을 맞잡던 순간 자신의 심장까지 부여잡은 느낌을 받았다. 떨렸다.
정현은 해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준희를 한번 보며 혼잣말 마냥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좋다."
"신기해."
'이런 게 운명일까.'
정현은 차마 뒷말까지 준희 앞에서 내뱉지 못했다. 의미부여를 너무 많이 하고 있다고, 혼자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겁이 났다.
"토스트로는 부족해."
"파핫, 배고파? 뭐 먹으러 갈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알리듯 식욕이 돋은 준희가 배에 손을 올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런 준희가 귀여운지 정현은 웃음이 터졌다. 준희와 정현은 이틀새에 몇 달은 본 사이처럼 가까워졌다. 운명이 아니라고 하기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갈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 타코 맛있는 데가 있는 거 같던데, 타코 좋아해?"
"타코~~? 좋지."
"어디야?"
"근처야, 메인스트릿 쪽에 있어."
"가자."
준희는 머리에서 선글라스를 내려 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현은 준희가 굉장히 밝고 활기찬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즉흥적이고 낯도 가리지 않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준희가 그런 모습을 내비치는 사람은 특별하다는 것을 정현은 알 수 없었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가면 이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에게 마음의 짐이 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정현에게 남은 시간은 캘리포니아 이 헌팅턴비치가 끝일 수 있었지만 더 바라고만 싶어졌다. 나의 생을 받아들이고 온 여행에서 가혹한 바람이었다.
길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준희는 바람을 가르며 지나는 자전거에 눈이 갔다.
"타코 먹고 우리도 자전거 탈까?"
"자전거?"
"응. 한 바퀴 돌면 좋을 거 같아."
"그러자. 내가 묵는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려줘."
정현은 옆에 선 준희를 내려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어쩐지 준희와 자신 사이에 편안한 온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 준희는 끄덕이며 그의 다정한 웃음을 보았다. 햇살이 그를 비추어서인지 유독 정현이 빛나보였다.
"저기야."
정현이 가리킨 타코 가게는 빛바랜 노란색 간판에 하얀색으로 가게 이름이 쓰여있었고, 테라스에는 이미 손님들로 가득했다. 정현과 준희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막 일어나는 손님이 있어 준희가 자리를 잡았다.
"타이밍이 좋았어."
"그러게"
"맥주도 마실까?"
"술 괜찮아?"
"그럼~"
"또 뭐 먹을래?"
"그냥 맛있는 거 골라줘"
"보자, 나초도 하나 하고.."
정현은 메뉴판을 보며 베스트 메뉴로 보이는 것들로 주문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연신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 사이 주문한 메뉴들이 한가득 나왔다.
"크~ 시원해"
맥주 한 모금 마시며 준희는 권하는 듯 정현을 바라보았다.
"건배는 해야지"
"아아"
가늘게 눈을 뜨고 장난스럽게 얘기하는 정현의 말에 준희는 들고 있던 맥주병을 그가 들고 있는 맥주병에 살짝 부딪혔다.
"짠"
준희가 건배하자 정현도 맥주 한 모금을 마셨다.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이 순간이 행복이라 느껴졌다. 준희는 타코를 한입 가득 넣고 오물거리며 한쪽 눈썹을 올렸다. 맛있다는 표현이었다.
"맛있어?"
"으응. 맛있어. 메뉴 잘 골랐어."
준희의 말에 정현도 하나 집어 들고 먹기 시작했다. 준희는 티슈로 손을 닦아가며 나초도 연신 집어 먹었다. 정현 역시 마지막 한입을 오물거리며 손을 닦았다.
"이제 좀 배부르네."
"파핫, 나도 잘 먹었어."
준희의 말에 정현은 귀여워 웃었다. 누군가 사랑하게 되면 먹는 것 하나까지 귀여워 보이게 된다지만 벌써 이 정도로 마음이 커진 게 당혹스러우면서도 슬펐다. 감정이 휘몰아치기 전에 그녀를 더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을 유예할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