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뜻한 공기와 화창한 하늘 아래, 시원하게 뚫린 바다 표면이 펼쳐지는 캘리포니아.
준희는 해변 근처에 숙소를 구해 한 달간 렌트하였다. 돌아갈 날은 정하지 않았지만 1, 2주 머무를 생각은 아니었기에 마음에 드는 숙소를 한 달가량 빌렸다. 일층은 카페가 있는 건물이라 커피를 즐기는 준희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은 대충 펼쳐놓고 침대에 몸을 던진 지 하루가 꼬박 지났다.
“하”
준희는 꿈틀대며 무거운 상체를 일으켰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다 눈을 비비며 생수를 꺼내 마셨다.
“하~”
푸석거리는 머리를 질끈 묶고 창문을 열어 드넓은 해변을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한편으로는 극복하고 살아가도 되는 일일까 하는 죄책감도 들었다.
“꼬르륵”
뱃속에서 준희가 살아가고 있다는 알림마냥 소리를 내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와 양치를 한 후 일층 카페로 내려갔다. 커피와 토스트를 주문하고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뜨거운 햇볕에 가지고 내려온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눈앞의 거리를 감상하였다.
그 시각 정현은 자전거를 타고 해변 근처를 돌고 있었다. 모래가 발에 묻는 게 싫어 해변 가까이는 가지도 않았다. 양말까지 철저하게 신고 나온 정현이었다. 손에 뭔가 묻는 것도 강박적으로 꺼려해 수시로 손을 씻어내는 정현은 캘리포니아의 청량함을 눈으로 감상할 뿐이었다.
유유히 거리를 돌며 현지인과 여행객들이 뒤섞여 여유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자신과 대비되는 거 같아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지나다 끌리는 곳에 앉아 커피 한잔만 즐기고 싶었다. 그때 테라스에 몸을 축 늘린 채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준희였다. 넓고도 낯선 이 해변에서 같은 비행기를 탄 사람을 만날 확률이란 얼마일까. 하지만 카페에 들어서 마주하기 전까지는 준희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늘어진 한 사람 덕에 카페가 눈에 띄었고 한적한 느낌이 마음에 들어 자전거를 세웠다.
에스프레소 한잔을 주문하고 남은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이내 준희와 정현의 메뉴가 서빙되었다. 준희가 몸을 일으켜 제대로 앉으려다 무릎으로 테이블을 쳐 커피가 넘쳐흘렀다.
"으"
준희가 휴지를 가지러 일어나 카운터로 향하려다 발이 의자에 걸려 넘어질 듯하다 중심을 잡았다. 그 움직임이 정현의 테이블을 쳐 에스프레소가 일렁였다.
"sorry"
준희가 선글라스를 머리에 올리며 정현에게 말을 건네었다. 테이블 쪽이 아닌 살짝 몸을 튼 채로 앉아 있던 정현이 부딪히는 것에 놀라며 준희의 얼굴을 보았다.
'어!'
"괜찮아요."
한국말로 답하며 준희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바람에 흘러 들어오는 정현의 향이 밧줄로 묶어 둔 심장의 줄 하나를 끊은 듯 준희의 맥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좋다’
바디워시부터 로션, 향수까지 켜켜이 향을 쌓는 것을 즐기는 준희였다. 정현에게서 흘러나오는 향은 시원하면서도 축축한 이끼향이었다. 정현은 뒤와 옆머리는 짧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왁스칠하지 않은 앞머리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호쾌해 보이는 표정과 운동을 즐긴 듯한 슬림한 근육질의 몸, 발목에 올라온 양말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짧은 순간 정현의 세심함이 준희의 눈에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한국말로 답한 정현에게 준희는 한국말로 다시 사과하고는 휴지를 가져와 손과 흘린 부분을 닦았다.
“여행 오셨어요?”
정현은 비행기에서부터 참아왔던 말을 겨우 꺼내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더 깊은 연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네”
준희는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앉아 토스트 한입 베어 물었다. 준희는 정현이 충분히 자신의 관심을 끌었지만 연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적극적으로 대화에 임하지 않았다.
"어제 도착하지 않으셨어요?"
정현은 이렇게 닿은 김에 반가웠던 마음을 다 쏟아내기로 했다.
"어.. 네"
좁게 붙은 테이블 자리라 각자의 자리에서도 충분히 목소리가 오고 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꽤나 대시를 받았던 준희는 정현의 질문들이 흔한 수작질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정현이 가벼워 보이기도 했다.
"저희 같은 비행기 탄 거 알아요?"
"..?"
"제가 옆자리였어요."
"네?"
준희는 도시적인 인상과는 달리 운명론자였기에 정현과의 우연들이 여행의 설렘을 자극하는 듯했다.
"아.."
"여기엔 얼마나 있어요?"
"아직 안 정했어요."
"언제 돌아가세요?"
"글쎄요..."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요"
정현은 한 달 뒤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준희에게 한정된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준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최대한 그 시간을 맞추고 싶었다. 내 시간보다는 너와의 시간이 짧겠지.
"숙소가 어디예요?"
"저 여기 3층이요. 한 달 렌트했어요."
카페 위를 가리키며 준희가 숙소를 알려주었다. 왠지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안 친구가 되어줄 거 같은 정현에게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알려 준 것도 준희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어차피 결정된 일정이 아니었기에 저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다.
정현은 한 달이라는 준희의 말에 운명이 있다면 정말 이런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리는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왜 지금일까.
"저도 여기서 10분 거리에 숙소가 있어요"
"사실 한 달 정도 쉬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혼자 왔어요?"
"아, 내 이름은 최정현이에요"
"네, 좀 쉬려고 혼자 왔어요. 김준희예요"
준희는 아직 낯선 정현과의 대화가 어색했지만 불편함이 느껴지지는 않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거는 모습이나 잘 정돈된 차림과 그 사람의 분위기를 풍기는 향이 한국에서의 준희의 모습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의 매일이 회의적으로 느껴지는 자신의 마음을 깨우려고 온 캘리포니아에서 한국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라니. 마음이 간사하다고 느껴지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띠고 있는 준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