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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8화 황량하고 행복한

연민과 사랑 사이

by 문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바람 소리만 정현과 준희를 채우고 있었다. 말로 하지 못했을 뿐 서로의 눈으로 마음을 확인했다. 먼저 말을 내뱉었을 때 상대가 발을 뺄 만큼 못된 사람이 아니란 건 둘 다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못한 것은 그 이상의 정리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충동적으로 누군가의 세상에 들어갈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쉬운 상대도, 결정도 아니란 것도 뻔했다. 순간의 수습하기 힘든 일을 벌이고 이 시간을 바로 끝내고 싶지 않아 더욱 조심스러웠다.


"들어가서 쉬어"


정현이 준희의 숙소 앞에 차를 세웠다. 벨트를 풀고 준희는 정현에게 입으로만 미소 지어 보였다.


"응. 오늘 재밌었어."

"너도 들어가서 좀 쉬어"

"운전하느라 피곤하겠다."


숙소로 들어간 준희는 바로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다. 나른해지는 듯하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하..."




정현은 호텔로 돌아가 창문을 모두 열었다. 죄어오는 가슴 통증에 방의 공기까지 갑갑하게 느껴졌다. 마음의 문제인지 몸의 문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약을 하나 털어 넣었다. 창에 기대어 한동안 밤바람을 느끼다 샤워를 했다. 개운해지는 몸과 달리 여전히 덥기만 한 마음에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현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준희와 헤어진 지 두 시간가량 흘렀을까. 정현은 호텔을 나가 준희의 숙소를 향해 걸었다. 준희의 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아직 잠들지 않은 걸까. 준희를 마주하면 알아야 할 것들은 다 잊어버리는 듯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지 못했다. 준희의 방 불빛 아래 서성이다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어젯밤 씻은 몸이 아직 보송보송한 채 준희는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피곤했는지 어젯밤 씻은 후 불을 켜둔 채 침대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머리를 대충 묶어 올리고는 일층 카페로 갔다. 에스프레소와 토스트를 주문하고 테라스로 가 앉았다. 여전히 날씨는 화창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유로워 보였다.


'정현은 뭐 하고 있을까'


에스프레소를 한입 마시며 그를 떠올렸다. 어제 헤어지며 그다음 약속은 잡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자 은영이 떠올랐다. 전화해볼까. 바로 은영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은영아~"


"준희야~!"

"어디야 거기?"


"여기 숙소 일층 카페야"

"퇴근했어?"


"응! 이제 막 왔어"

"날씨 너무 좋아 보인다~~"

"뭐 하고 있어?"


"커피 마시고 있어."

"그리고.."


"뭐라고~~? 잘 안 들려. 준희야"

"나 옷 좀 갈아입을게"


"응!"


"준희야, 나 왔어!"


"응~"


"어제는 뭐 했어?"


"어제 정현이랑 할리우드사인 보고 왔어."


"진짜?!!!"

"와!!"


"응. 어쩌다 보니."


"나도 얼른 보고 싶다~!"

"오늘은 안 만나?"


"오늘?"

"글쎄.."

"아, 네가 준 카메라로 사진 찍었어"


"정말?!"

"거기도 인화하는 데 있어?"


"아.. 그건 모르겠는데."

"그러게.. 어떻게 주지."


"그냥 한국에 들어오면 인화해서 줘~"


"한국에서.."


"응!"

"그분은 한국에 언제 온대?"


"모르겠어"

"금방 갈 거 같기도 하고... 씁.."


"아무튼 준희 네 얼굴이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걱정했는데"

"잘 간 거 같아!"


"그런 거 같아. 그냥 다른 생각은 안 하게 돼"


"정현이도 만나고!"


"응.. 뭐.."


"정현이 만나면 나한테 보여줘~!"


"알았어ㅎㅎ"

"근데 어떻게 만나지"


"응?"

"그냥 놀자고 하면 되는 거 아냐?"


"음.. 그러고 보니 핸드폰번호는 몰라. 호텔은 아는데.."

"그리고 걔가 늘 여기로 와서 만난 거거든"


"그래?? 그럼 오늘도 오지 않을까?"


"언제 올 지는 몰라"


"뭐야~~ 그럼 어떡해! 만나면 번호 꼭 물어보구!"

"사진도 한국 가서 주겠다고 꼭 말하구 알았지?!"


"알았어~"

"은영아 그럼 이제 쉬어. 일하고 왔는데 피곤하겠다."


"응응. 나도 또 전화할게! 카톡도 좀 보구!"


"응~~"


준희는 은영과 전화를 끊고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상기가 되는 듯했다. 오늘은 카페에서 보이지 않는 정현이 내심 서운했다. 피곤했나? 준희는 방으로 돌아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바꿔 입고 에코백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집에서 먹을 과일과 이것저것 살 참이었다. 즐비한 상점들을 군데군데 들르며 과일 봉지를 들고 정현이 묵고 있는 호텔 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음..'


정현이 자전거를 빌려 나오던 것을 지켜보던 자리에서 서성이며 괜히 머뭇거렸다. 그런 스스로가 자각되자 민망해져 숙소로 발길을 돌리던 준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 몸을 돌려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준희는 프런트로 가 정현의 이름을 대며 친구라며 방 번호를 물었다. 일상 대화 정도는 영어로 거뜬히 하는 준희라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호텔 직원은 당연히 거절했다. 준희는 거절당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물으러 온 자신이 어이없어 헛웃음이 났고 그녀에게 사과 하나를 건네며 한국에서 '사과'의 중의적인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 준희를 보며 호텔 직원은 정현의 방으로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어봐줄 수는 있다는 제안을 했다.


"for real?"

"thank you!"


직원의 통화는 길지 않았고 준희가 로비에 있다는 내용만으로 정현이 내려오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준희는 로비 한켠에 앉아 정현을 기다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머리를 감싸며 자괴감이 몰려올 때쯤 정현이 준희에게 다가갔다.


"준희야"


정현은 통이 넓은 린넨의 긴 하얀 바지에 허벅지 반 정도까지 내려오는 품이 큰 하얀 반팔티를 입고 있었다. 준희는 그를 보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고 어색하게 웃었다.


"어.. 안녕!"


"어떻게 왔어"

"그건 뭐고."


"아. 지나가다 과일을 좀 샀는데"

"가는 길이라 들렀어"

"심심하기도 하고!"

"너도 먹을래?"


정현은 햇살이 들어서는 로비에 앉아 과일을 내미는 준희를 보며 그저 입가에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정현은 준희를 방으로 초대했다. 준희와 걸으며 그녀를 숙소에 데려다주어도 되었지만 자신의 공간으로 초대하고 싶었다. 정현은 커피를 내리고 얼음을 넣어 준희에게 내밀었다.


"하~ 시원해. 고마워."


"이거 다 나 주는 거야?"


"다? 다 먹어도 되긴 하지"


"됐어. 이거만 먹을게. 고마워"


정현은 사과 두어개만 꺼내 올리고는 하나를 베어 물었다.


"아침은 먹었어?"


"거기서 토스트 먹었어."

"왜? 뭐 만들어주려고?"

"해주면 먹을 수는 있지"


"그럼 파스타 좋아해?"


"응. 알리오올리오 좋아해"


"그럼 조금만 해줄게"


정현은 푸실리로 알리오올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준희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는 것을 흘끗흘끗 보기도 했다. 하얀 그릇에 푸실리를 담아 식탁에 올리며 그녀를 불렀다.


"우와~ 그럼 먹어볼까?"

"음~ 꽤 하는 걸?"

"쉬운 요리지만~"


정현을 놀리듯 준희는 포크로 푸실리를 찍어 먹었다.


"좋아하는 음식 있어?"


"요리 잘해?"


"글쎄. 그냥 만들어 먹는 정도야."


"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다음에 또 만들어줄게."


"정말?"


"응."


정현은 숟가락으로 푸실리를 퍼 먹으며 준희가 잘 먹는지 관찰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는지 핸드폰을 찾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번호를 모르더라"


"아 맞아!"


준희는 정현의 핸드폰에 번호를 남겨주고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그의 번호를 남겼다.


"사진 찍은 건 한국 가서 인화하면 줄게."


"한국?"


"응. 왜?"


"아냐. 그래."


정현은 진통이 잦아들고 있어 생각보다 빨리 한국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현은 먼저 한국에 들어가 병이 악화되면 준희를 다시 만날 수 없을까 두려웠다.


"넌 언제까지 있을 거야?"


"나? 음.."


"나는 곧 들어가야 할 거 같아."


"진짜?"


준희의 눈에 식탁에 놓여있는 약통이 들어왔다.


"응.. 몸도 안 좋고.."

"다음 주엔 들어가야 할 거 같아서 티켓 보고 있었어"


준희는 포크로 접시만 몇 번이고 내려 찍었다.


"한국 돌아오면 연락해"


준희는 정현의 말이 서운하게만 들렸다. 정현의 상황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철부지 아이처럼 서운한 마음이 드는 자신이 복잡했다.


"응.."

"다 먹었다~"


준희는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짠"


다시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준희는 목에 걸고 온 펜던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어.."


정현은 목걸이를 꺼내 보이는 준희를 보며 심장이 아렸다. 일반적이라면 그녀의 변화에 벅참과 기쁨으로 가득 차야 할 순간이었지만 정현의 마음은 저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면 덜 아플 것 같은 예감이 들고 있었다.


"뭐야?"


준희는 정현의 반응에 찬 바람이 부는 듯 외로워졌다. 그가 웃는 모습 한번 보기 위해 하고 온 목걸이가 예상과는 다른 반응으로 돌아오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 아니.. 감동받아서."


정현은 준희를 안심시키듯 다시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보고 준희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준희는 정현의 반응으로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아서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정현이 꽤나 자신을 깊은 마음으로 아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친구 은영이라고 저번에 말했잖아."

"은영이가 너 궁금하대."

"한국 가서 같이 봐도 좋겠다!"


정현은 준희가 애써 자신을 평범한 사람들처럼 대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들이 이제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모든 얘기들을 진지하게 받아치게 만들었지만 준희가 밝게 웃고 있는 이 상황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0.00001%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 얘기했다.


"그러자."

"궁금해. 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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