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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9화 그 사람의 세계

현실

by 문화

숙소로 돌아간 준희는 마음이 허전했다. 정현이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 이대로 따라 들어가는 것이 맞을까. 자신의 마음 상태를 돌아볼 때가 왔음을 알았다. 한가롭고 따스하기만 한 캘리포니아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캘리포니아로 오자마자 정현을 만나 차마 치유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정현 없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또 어떤 영향을 줄 지도 알 수 없었다. 부딪혀보는 것이 전부였다. 준희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캘리포니아는 원한다면 다시 올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시간을 보내고 한국을 갔을 때 정현은? 인생의 우선순위를 생각할 만큼 정현이 자신에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준희는 한국에서 이미 겪었다. 소중한 사람을 혼자 두지 않는 것이 그 순간에 최선이라는 것을.

준희는 핸드폰을 꺼내 정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으로 가는 날짜를 물었고 자신도 그만 돌아가려 한다는 뜻을 전했다. 메신저로는 정현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정현은 어떻게 생각할까. 혼자 앞서는 마음일까 멈추어야 하나 했지만 주고 싶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주고 싶었다. 소모할 수 없는 마음을 끌어안고 있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다. 며칠 간의 정현에 대해 느낀 대로라면 그도 자신과 함께하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확신했다.

정현이 말한 날짜에 준희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끊고 나니 모든 것이 풀리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음대로 사는 것이 현실이 여의치 않을 때가 많지만 마음대로 살기 위해 선택한 지금의 자유를 충분히 즐겨야 한다. 소중한 사람이 언제나 내 옆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준희는 알고 왔기에 지금 정현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아빠를 보내며 후회한 순간을 치유하기 위해 정현이 내게 온 것일까.




준희의 메시지를 받기 전 정현은 통증을 버텨내며 약을 털어 넣었다. 미미한 통증이 느껴져 준희를 얼른 돌려보냈다. 그런 그녀로부터 한국 가는 날짜가 언제냐는 메시지가 왔다. 겁이 났다. 자꾸만 뚫고 나오는 준희의 마음과 그 마음을 받고 싶어 지는 자신의 마음이. 준희의 마음은 연민이 섞인 사랑일까. 침대에 누워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 답장을 했다. 준희와 한국에 같이 간다. 그렇게 온몸으로 퍼지는 약의 기운과 함께 잠이 들었다.




준희는 숙소에 펼쳐진 짐을 하나 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 은영에게 돌아가는 날짜를 메시지로 알려주었다. 은영은 준희의 메시지에 놀람과 기쁨으로 공항으로 마중 가겠다는 답을 했다. 준희는 목걸이를 손끝으로 매만지다 다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시 한번 묶어 올리고 정신없이 캐리어에 짐을 욱여넣는 와중에도 얼굴에는 밝은 빛이 돌았다.




"띵띠리링띵띵띵띵--"


핸드폰 기본 벨소리가 울리며 정현의 잠을 깨웠다.


"응. 혜선아."


"정현아, 자고 있었어?"


"응. 잠깐 잤어."


"미안, 내가 깨웠네."


"괜찮아."


"다음 주에 한국 오지?"


"응. 그렇게 됐어."

"어떻게 알았어?"


"도영이한테 들었어..."


"그렇구나."


"보고 싶어."


"..."


"도영이랑 같이 공항으로 갈게."


"아니야. 괜찮아."


"갈게"


"...."


정현은 침묵을 지키며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내 전화기 너머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약해진 정현은 혜선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럼 그날 봐"


"응.."


정현은 혜선의 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혜선, 도영과는 고등학생시절부터 친구였다. 혜선은 학창 시절 도영이 좋아하면서 친구가 되었는데 혜선이 받아주지 않자 둘은 친구가 되었고 도영의 친구였던 정현이 함께 어울리면서 셋은 친구가 되었다. 성인이 되면서 셋이 어울리는 일이 드물었지만 혜선이 정현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가 늘면서 관계가 유지되었다.




정현과 준희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전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비치를 돌기도 하고 마켓에서 함께 해먹을 재료도 사며 캘리포니아의 여유를 즐겼다. 하지만 하루에 같이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현의 체력이 버텨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준희에게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준희의 숙소 카페에 아침을 먹으러 간 날이면 오후엔 호텔로 돌아갔고, 오후에 만나 비치를 걸은 날이면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쯤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함께 있을 땐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피하고 싶은 현실을 캘리포니아에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


준희가 캐리어를 수화물로 싣기 위해 체크인 카운터에 올리며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정현이 나머지 캐리어를 들어주며 준희를 도왔다.


"내가 해준다니까."


"하나쯤은 괜찮아. 후.."


붐비는 사람들로 시간에 딱 맞춰 수속을 마친 정현과 준희는 서둘러 들어가 나란히 발급한 좌석에 착석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해"


준희는 자려고 자세를 고쳐 잡으며 정현을 보며 얘기했다. 그런 준희의 말에 정현도 동의했다. 한국으로 준희와 함께 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던 선택지였다.


"기내식 나오면 깨워줄게"


"참 나"


정현은 다정하고도 사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준희는 비행 동안 볼 영화를 고르는 정현을 보고 안대를 내려썼다.




정현이 준희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준희는 인기척에 안대를 벗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도착했어?"


"응. 엄청 잘 자네"


"흐아아암~~"

"내 장점이야"


"푸핫"


한국에 도착한 정현과 준희는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으로 향했다. 아직 몸이 찌뿌둥한지 준희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누군가 정현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정현아!"


"어.."


정현을 마중 나온 혜선과 도영이 그를 발견하고 바로 다가온 것이다. 준희가 본 혜선의 표정은 반가워하면서도 눈에는 눈물이 고인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준희야~~!"


은영이 준희를 발견하고는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어.. 음.."


준희는 예상치 못한 정현의 지인 등장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예상대로라면 은영과 인사하고 함께 갈까 했는데 정현 역시 누군가 마중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해 머뭇댔다. 혜선은 정현의 한쪽 팔을 잡고 계속 정현만 보고 있었다. 준희는 비켜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은영이 준희 옆에 다가와 정현에게 인사했다. 은영은 한눈에 그가 정현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 우리는 가볼게."


"안녕하세요."

"연락할게"

"너도 들어가서 연락해"


정현은 은영에게 인사하고 준희에게 가보라는 듯 얘기했다. 정현의 옆의 혜선은 준희를 보며 눈인사를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혜선을 지키듯 옆에 선 도영 역시 준희에게 살짝 끄덕이며 인사했다. 준희는 이 순간 여기가 한국이라는 자각을 했다. 준희 역시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정현에게는 손인사를 하고 뒤돌아 떠났다.


"누구야?"


멀어지는 준희의 뒤로 혜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현의 답이 궁금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것만 같아 의식하지 않는 척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준희야, 가서 떡볶이 먹자."


영문을 모르는 은영의 말이 준희의 마음을 오히려 가볍게 해주는 듯 그녀와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현은 마중 나온 혜선과 도영에게 인사를 하고는 준희를 부르는 소리에 다가오는 은영을 보았다. 준희가 얘기했던 그녀의 친구인 듯했다. 서로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어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헤어지는 거 같아 아쉬웠다.


"누구야?"


"좋아하는 사람.."


"뭐?"


정현의 대답에 놀란 혜선의 눈에는 눈물이 말랐고 정현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생했어."

"가자"

"가서 얘기하자"


도영은 정현의 캐리어를 가져다 끌며 혜선의 말을 끊었다. 정현의 낯선 대답에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녀의 존재에 대해 보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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