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은영의 차 조수석에 앉아 준희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은영은 운전하며 연신 재잘거렸지만 준희는 서울의 야경이 더 눈에 들어왔다. 저 많은 건물들 안에서 나오는 빛들과 그 빛을 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며 익숙한 풍경에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은영은 거친 운전 실력으로 준희의 집에 평균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트렁크를 열고 준희의 짐을 같이 꺼내주며 배고프다고 이동을 재촉했다.
"띠리링"
준희는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 불부터 켰다.
"춥지?"
보일러를 틀며 따라 들어오는 은영에게 캐리어를 건네받아 한쪽으로 옮겨두었다. 은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들었다.
"일단 뭐 먹고 얘기하자! 어우~ 배고파"
"먹고 싶은 거 시켜"
"음~보자~로제떡볶이가 맛있더라고~어때?"
"좋아, 마음대로 주문해"
"그럼~ 일단 떡볶이랑 회도 조금 주문할까?"
은영이 주문하는 동안 준희는 방으로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너도 물 마실래?"
준희는 부엌으로 가 정수기에서 미온수를 내리며 은영에게 물었다.
"응! 나는 찬 물로"
은영은 준희가 평소 미온수로 마시는 걸 알고 있어 차가운 물로 내려달라 부탁했다. 준희는 은영에게 물을 가져다주며 소파 밑에 앉아 기대었다.
정현은 도영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등을 기대었다. 조수석에 앉은 혜선이 슬쩍슬쩍 뒤를 보며 그의 컨디션을 걱정했다.
"힘들게 뭣하러 왔어."
"여행은 어땠어?"
"혜선이가 걱정했어."
정현이 눈을 감고 그들에게 얘기하자 도영이 혜선의 얘기를 꺼냈다. 혜선은 아무 말 없이 손만 만지작 거렸다.
"고마워."
"덕분에 편하게 가네."
"근데 그 친구는 어떻게 만났어?"
"한국에서도 알던 사람이야?"
도영이 정현에게 공항에서 만난 준희에 대해 물었다. 혜선은 그 얘기에 눈을 굴리며 정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만났어."
"아.. 한국에서부터 알았다고 해야 하나?"
"무슨 말이야 그게."
"같은 비행기를 탔거든"
"거기서도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됐어"
"근데 좋아하게 된 거야?"
"그러게."
"그렇게 되더라고."
덤덤하게 얘기하는 정현의 목소리에 혜선은 엄지손가락만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정현이 만난 몇몇의 애인들을 보기는 했지만 이토록 혜선의 마음을 동하게 하도록 정현을 변하게 한 그녀에 대해 궁금하고 궁금하지 않았다. 더 이상 거슬리지 않을 선에서 그녀가 정현의 세상에 들어오지 않길 바랐다. 정현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그 행복이 그녀에게서부터 오는 것은 원치 않았다.
도영은 정현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짐을 꺼내주었다. 정현은 미안하지만 다음에 초대하겠다며 둘을 돌려보냈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힘든 장기간 비행이 그를 지치게 했음은 자명했기에 도영과 혜선은 괜찮다며 그를 들여보냈다.
정현은 집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했다. 머리부터 흘러내리는 따뜻한 물이 온몸을 감싸고 나니 개운해진 정현은 머리를 말리며 준희를 떠올렸다. 연락하자고 했는데 아직 집에 도착하지 않은 걸까. 정현은 정적만 흐르는 집을 채우고자 티비를 틀고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마셨다.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다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을 들었다. 준희에게 잘 도착했냐는 메시지를 보내고 그대로 다시 소파에 누웠다. 이어 바로 준희에게서 답장이 왔다. 거실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들 사진과 친구와 함께 먹고 있다는 답이었다. 정현은 준희의 메시지에 혼자가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몸은 떨어져 있지만 정신은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에 적적한 이 공간마저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영상 통화 걸어도 돼?"
준희에게서 다시 온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