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관용과 적대감
집으로 간 수화는 옷만 갈아입고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먹다 남은 빵과 스프를 데워 간단히 저녁을 준비했다. 혼자 살다 보니 식사를 제대로 차려 먹은 일이 드물었다. 남자친구와 동거하던 때엔 종종 요리를 하곤 했지만 헤어진 후로 집에서 그럴싸한 요리를 한 적이 없었다. 티비를 틀어놓고 퇴근길에 사 온 엽서 카드를 꺼냈다. 지혜에게 엽서를 쓸 계획은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느낀 위기감에 펜을 쥐었다. 엽서에 쓴 내용은 나름 사실이고 진심이었다. 즐거운 연말을 보내길 바라며 새해에는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엽서를 가방에 넣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지혜와 정윤 그리고 타인들을 의식하느라 하루하루 피곤한 나날들이었다. 수화에게 그들은 자신이 선한 의도만 가지고 살도록 두지 않는 가해자들이었다. 움츠린 채 잠이 들었다. 알람에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세수만 하고 출근했을테지만 지혜에게 들었던 핀잔으로 애써 머리를 감고 출근 준비를 했다. 지혜로부터 얻는 공감과 지지를 놓칠 수 없었기에 그녀의 말을 쉽사리 넘기지 않았다.
출근길에 만난 지혜는 평소와 같이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 책을 읽었다. 회사 앞에 내려 수화는 크리스마스 엽서를 건넸다. 지혜는 놀라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수화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지혜는 의아했지만 편지로 마음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기에 감사히 받았다. 사무실로 간 수화는 여전히 혼자였고 영업팀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고데기로 머리를 만졌다. 웨이브를 내어 머리를 완성할 때쯤 이과장과 정윤으로부터 업무 메시지를 받았다. 수화는 모니터를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출근한 지혜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정윤과 인사를 했다. 정윤은 이과장님이 오전 근무 후 퇴근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점심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했다. 지혜는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알겠다는 답을 했다.
수화는 이과장, 정윤과 단체 채팅방에서 업무 일정을 공유하며 그간의 피드백을 받았다. 그닥 힘들지는 않았지만 영업팀 직원들 요청과의 간극에 그들에게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수화가 공감하는 쪽은 느슨한 운영을 원하는 영업팀이었다. 다만 자신의 입을 빌어 권리를 찾고 싶지 않았다. 그저 해당 내용을 영업팀 팀장에게 전달하면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지혜에게 연락이 왔고 사무실을 나섰다. 지혜가 제안한 식당으로 가기 위해 건물 밖에서 기다리다 멀리서 정윤과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뭐야..'
순간 표정이 일그러지며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알아본 듯 지혜가 수화를 불렀다.
"수화씨, 왜 뒤돌아요?!"
정윤 역시 수화의 표정과 행동을 보며 자신이 그녀에게 불청객이라는 것을 느꼈다. 지혜를 가운데로 정윤과 수화가 양 옆에서 아무 말도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정윤이 자리를 찾아 먼저 앉았고 그 옆에 지혜가 앉으며 다른 통로가 없던 수화는 자연스레 정윤의 건너편에 앉았다.
"과장님은..?"
수화는 한껏 작아진 목소리로 움츠린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대어 물었다.
"오늘 오후 반차셔"
수화의 표정을 읽은 지혜는 음식을 받아오며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수화는 자신의 옆자리로 온 지혜를 시선으로 따라보며 표정을 풀었고, 이내 밥을 한 스푼 떠먹었다. 정윤은 알 리 없는 이 상황이 여전히 불편하면서 불쾌했지만 수화에게 무슨 일이 있냐는 말을 건넸다. 하지만 수화는 여타 할 말이 없었고 그 침묵에 다시 숨이 막힌 건 지혜였다. 그토록 짧게 느껴졌던 점심시간, 한 시간이 게으름을 피우며 지나갔고 이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수화는 영업팀 사무실로 돌아갔고, 출근한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옆자리 영업팀 팀장은 돌아온 수화를 불렀다.
"수화야, 이 사람 어때. 소개받을래?
"누구예요?"
수화는 부쩍 친해진 영업팀 팀장에게도 주위에 괜찮은 사람이 없냐는 이야기를 꺼내 재촉했었고 그에 응하듯 팀장은 수화에게 사진을 줘보라며 주위에 돌리겠다는 허락을 구했었다.
"IT회사 다닌다더라"
"사진 볼래? 봐봐"
"좋아요!"
수화는 팀장에게 연락처를 건네받았고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메시지가 온 것은 정윤에게서였다. 할 말이 있으니 따로 보자는 얘기였다. 수화는 불현듯 불안감과 초조함이 올라왔고 그럴 때마다 손을 입술에 가져다대는 습관이 나타났다.
수화는 정윤이 부른 곳으로 가며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윤, 지혜와의 그간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친구였다. 정윤이 자신을 왜 불렀을까에 대한 설토가 이어졌다. 수화가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살피자 구석에서 손을 들고 있는 정윤이 보였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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