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이제 나 출발하는데 어디로 가면 돼?’
‘음…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지하철역에서 만나서 같이 오는 게 편할 거 같은데’
‘아니야~ 나 짐이 있어서 그냥 택시 타고 갈 거니까 주소 보내 줘’
‘응 알겠어~ 주소는 아직 잘 모르겠으니 찾아보고 보내 줄게’
‘응~’
오전에 늦게 일어나서 빈둥 거리고 있는데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급하게 일어나서 주소를 보내 주고 아직 남아 있는 짐들을 다시금 정리를 했다. 대충 다 된 거 같아서 나머지는 차차 살면서 정리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찾아서 없는 것들은 언제일지 모를 다음 이사 때 어김없이 찾게 될 테니.
“나 거의 다 왔어 내려와~”
“응 알겠어~”
그녀가 탄 택시가 도착했고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밝게 웃으며 나를 맞이해 줬다. 근데 특별히 짐이 있어 보이진 않은 그저 항상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만 가지고 있을 뿐.
“짐이 많다고 하더니?”
“ㅎㅎ 기다려 봐”
택시 트렁크가 열리고 짐이 한가득 있는 걸 봤다. 휴지며 세제며 그 이외에 기타 이런저런 것들이 많이 있었다.
“아니 이게 다 뭐야? ㅋ 슬이가 이사하는 거였어?”
“ㅋㅋ 뭐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그리고 엄마가 오빠 가져다주라고 한 것 도 있고”
“응? 진짜? 너무 감사드리는데”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지금처럼 쭈욱”
“넵~ 일단 짐부터 꺼내야겠다. 이건 다 어떻게 실었데ㅋ”
짐을 내리고 집으로 올라가서 그녀가 가지고 온 짐들을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전에 집 보다 큰 거 같은데 맞아?”
“비슷한데 전에 집은 방이 따로 있었고 지금은 그냥 스튜디오 형식이라서 조금 더 커 보이는 거 같아”
“아~ 그럼 환기를 잘 시켜야겠는데 공기 청정기 하나 사줄까?”
“아니야~ 환기 잘 시키면 되지 뭐”
“짐은 다 정리했어? 아직 안 한 거 있음 내가 도와줄까?”
“거의 다 했어. 나머지는 안 하고 그냥 살면서 필요할 때마다 찾으려고”
“에이 아니야~ 내가 도와줄 테니 지금 하자. 난 하고 싶은데….”
계속 거절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저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그것도 여자친구에게 계속적으로 안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그런 강단 있는 소수에 해당되지 않기에 그러자고 답을 했다.
“좋아~ 나 한 번은 해 보고 싶었어~ 왠지 신혼부부 느낌 나고 좋잖아”
“그래? 그렇게 보니 그러네~ 그럼 말 나온 김에 먼저?”
그러면서 은근히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침대 쪽으로 몸을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완고하게
“안돼~ 짐 정리하고 이따~”
그렇게 몇 개 남아 있는 박스들을 뜯고 정리를 했다. 대부분은 겨울옷들이나 겨울 이불들이어서 다시 박스에 테이핑을 하고 베란다 쪽에 가져다 두었다. 그렇게 베란다에 짐을 정리하고 들어와 보니 그녀가 작은 박스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렇게 좋지 않은 아니 별로인 표정으로 우두커니.
난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들고 있는 박스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과 함께 별로 덥진 않은 날씨지만 굉장히 몸에서 열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거 뭐야? 본의 아니게 뭔가 하고 열어 봐서 미안한데… 이거 왜 아직 가지고 있어?”
“아 그거? 이삿짐 싸면서 그냥 들어갔나 본데.. 지금이라도 버려야겠다. 줘”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될 리가 만무했다.
“이게 짐에 들어갔는지 몰랐다고? 오빠, 내가 오빠 성격을 아는데 이런 게 있다는 걸 모르고 짐을 챙겼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렇다. 그녀는 나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만난 기간은 이제 100일 정도 지났지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에 대해 너무도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난 그저 나에게 관심이 많아서 그러 것이라고 이때까지는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해 버리려고 했는데… 그냥 챙겼네. 뭐 다른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저…”
“그저 뭐? 편지라서 버리지 못한 거야? 그 사람의 성의가 들어가 있으니까?”
“아니면 보면서 예전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거야? 그때를 그리워하면서?”
“그런 거 아니야.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이삿짐 챙기면서 보긴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챙긴 거야. 슬이가 말하는 거 생각하는 거 그런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하는 말이 거의 다 맞긴 했다. 특별히 찾아서 보거나 하진 않았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짐정리를 하다가 눈에 띄면 하던 정리를 멈추고 그 자리에 앉아서 편지들을 몇 개 꺼내서 읽어 보곤 했다. 그러는 동안 회상을 한 것도 맞고 그때를 생각한 것도 맞지만 그리워하거나 하진 않았다. 난 지금 나의 연애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고 슬이를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
“지금 당장 버릴게 줘. 슬이가 보는 앞에서 버릴게”
“됐어 오빠 맘대로 해”
그렇게 박스를 바닥에 떨군 채 그녀는 가방을 들고나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내 고개도 심장도 더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추락해 버렸다.
그녀가 나가고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그리곤 의자에 힘없이 앉아서 저녁에 먹으려고 사 뒀던 맥주를 한 캔 땄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맥주였는데도 전혀 시원한 맛이 없이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원래 맥주맛이 달달하진 않지만. 더욱 절망적인 것은 ‘하루 만회 하기’ 능력도 사라진 거 같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그 능력이 사라진 이후로 다신 경험해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그간 내가 그 능력이 필요할 정도로 실수 혹은 잘못을 한 적이 없었다는 다행스러움과 그걸 한방에 오늘로 날려 버렸다는 절망스러움이 동시에 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