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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Nov 08. 2018

중간 고사

낯설고 매력적인 시험들

#대학 #중간고사 #나쁜사람



1.

분명 중간고사까지 배운 것은 소셜 네트워크 분석에 대한 것이었다. 기업 내의 개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점과 선으로 시각화하고,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목적에 맞게 가장 유능한 점을 도출하는 이론과 생각들.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 받아 든 시험지는 참 낯설었다.

MEDICI FAMILY 메디치 가문

참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왜 이 이름이 이 시험지에 있을까 잠시 고민한다. 교수님은 15세기 피렌체 유력 가문들의 관계도를 들고 와 우리에게 10여 페이지 정도의 서술형 문제를 내던지고 가셨다. 언뜻 본 교수님의 미소가 아른거려 손목이 시큰거릴 때까지 유쾌하게 글을 적었다.


2.

"이번 시험은 오픈북 테스트로 진행하겠습니다."라는 말에 위안을 얻을 만한 시절은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어리석은 학생은 단 꿈을 꾸었다. 칸트와 헤겔만 해도 텍스트가 한 뭉텅이. 눈이 침침해져 사람이 배움이 지나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기지개를 켤 때 즈음 시험이 시작되었다. 긴 시험용 원고지에 딸려 오는 세 줄짜리 시험 문제. 흉악하기 그지없다.


오픈북 테스트가 끝날 때까지 텍스트는 몇 단어의 철자를 확인할 때를 제외하고는 들춰보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공부를 좀 했기에 세 번째 문제는 이 텍스트 어디에도 그 내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익살스러운 교수님의 말투를 빌려 그 눈빛을 해석하자면 오픈북 테스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네가 보면 아나?


참 즐거운 중간고사다.


3.

한 번 크게 당한 적이 있는 교수님과의 두 번째 강의란 상당히 부담이 된다. 고급 논리 수업 중간고사가 끝나고 받아 든 22점짜리 시험지의 웅장한 자태란 아무리 시험의 평균이 19점이었다고 해도 쉽게 잊힐 리가 없다. 그런 참혹한 현장에 100점을 받은 이가 있었으니 그것도 나름대로 충격이었더랬지. 세상에 천재는 있다.


언어 철학 수업의 중간고사는 나쁘지 않았다. 단출하고 꾸밈없는 시험 문제라 담백한 마음으로 답을 적고 나왔다. 중간고사 기간의 마지막 시험이었던 지라 노른자 통통한 신선한 계란 같은 기분으로 강의실을 나왔는데, 과연 뽀얀 프라이가 될 것인지 만신창이 스크램블이 될지는 교수님께 맡길 차례다. 그래도 22점짜리 시험지는 아닌 것 같아 기분이 가볍다. 시험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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