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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우 Jun 25. 2019

봄꽃 다독이기

백여섯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꽃이 피더니, 아니나 다를까 꽃샘추위가 왔네요. 서울은 영상 1도. 간밤에는 마르게 눈도 내렸어요. 세상에 닿자마자 흩어져 없어지는 메마른 눈에 4월 햇살을 쬐러 바깥에 내어둔 우리 집 커피나무는 몸살에 걸려 잎끝이 새카맣게 죽어버렸더군요. 불쌍한 커피씨. 일단 집 안으로 들여놓았는데 잘 회복할지 모르겠답니다. 쾌유를 빌어주세요.


 한바탕 비를 떨구고 찬 바람을 두른 제주도 때문에 당신은 이번 주말 내내 힘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반환점을 갓 돌고 나서 쭈욱 힘이 빠져버린 당신을 나는 어떻게 보듬어줄 수 있을까요. 많이 힘들었을 텐데, 공부가 특기라면서 웃었던 아가씨지만 아무렴 특기라 해도 쉴 틈 없이 매일 이어지는 공부가 쉬웠을 리가 없죠. 매주 꼬박꼬박 계획되어 있는 시험들과 매주 마주해야 하는 그 결과들. 다시는 오지 않을 스물여섯 제주도에서의 시간인데 아쉬울 거예요. 추억을 만들고도 싶고 전에 없이 마음껏 운동해보고도 싶고, 속 편히 한숨 쉬어가고도 싶을 텐데 매시간 부담감이 은근슬쩍 다리를 올려놓아 답답하기도 할 거예요. 이 버거운 4월을 내가 편지로나마 살살 달래 볼 테니, 이 편지를 받은 날만이라도 웃으며 잠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봄이 와서 요즘은 햇살이 참 달아졌다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따사롭고 포근한, 사람을 간지럽히는 햇살. 나는 이 햇살을 받으면 가끔 네 생각이 나요. 정확히 말하면 4년 전 우리 100일 날, 내가 선물해준 팔찌를 차고 햇살에 팔을 들어 비추어보던 당신 모습이 문득문득 생각이 납니다.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당신의 보드라운 팔에 맑은 햇살이 담뿍 담겨 투명하게 빛이 나고, 100이라고 맞추어 매달아둔 숫자를 보며 웃던 당신. 꽃이 가득한 곳으로 놀러 갔는데 차마 눈을 뗄 수 없게 예뻤던 우리 아가씨와 함께라 꽃구경한 기억이 별로 없는, 세상 모든 게 서툴러도 내 옆에서 웃는 모습 하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쾌활해 보였던, 행복한 아가씨 모습이 이 달콤한 봄햇살에 비쳐 보여요. 참 소중하고 보물과 같은 기억이죠. 봄 새로 자라난 연하고 보드라운 어린 나뭇가지 같았던 당신. 그 날의 햇살이 달았던 것인지 당신이 달았던 것인지 지금에 와서는 도통 알 수가 없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4번 그리고 새 봄. 때로는 더웠고 때로는 추웠던 수많은 계절의 바람을 맞아 그 나뭇가지도 많이 마르고 단단해진 것 같아요. 나도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들뜬 그 모습이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여전히 꽃을 샘내는 추위가 간혹 놀러 오곤 하겠지만 비를 맞고도 꽃을 떨구지 않은 그 봄 가지의 싱그러운 모습이란 더없이 아름답죠. 나는 이 날을 견딘 그대가 그렇게 되리라 믿어요. 느리지만 쉼 없이 자라는 사람의 잔잔한 매력이 되어서요. 아직은 조그마한 가지라 마음껏 기댈 수는 없지만 당신은 내게 항상 의지가 되는 사람이에요. 때로 마음이 찬 날도 있을 테고, 몸이 무거운 날도 유독 의욕이 없는 날도 있을 테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라요. 마음을 다해 사랑해요.



2018.04.10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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