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곱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To. 콩 아가씨
서로에게 까끌까끌한 말들을 조금 쏟아냈던 지난 금요일. 많이 서운해했고 또 아파했던 그 날에 나 별안간 기분이 좋아졌던 순간이 있었어요. 특별할 것 없는 아침 출근길이었는데, 코 끝을 스치는 달콤한 향기에 아침잠이 달아나 버렸거든요. 라일락이었어요.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 하이얀 꽃의 향기에, 그 순간 내 마음속에는 그 어떤 가시도 없이 보드라운 생각만이 남았던 것 같아요. 내내 마음을 괴롭히던 생각들이 그 순간만큼은 사르르 하고 녹아 없어지고 당신이 보고 싶었어요. 미운 짓 쟁이 아가씨가 갑자기 너무 보고 싶고, 보이면 달려가서 안아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고 싶었네요.
라일락이라는 꽃을 내게 처음 가르쳐주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어요. 우리가 처음 사귀고, 아직 목동에 있던 누나 집에 매일 당신을 바래다주던 그때. 돌연 주변을 향으로 가득 채워낸 이 봄꽃을 보고 당신은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며 웃었고, 내게 이 꽃이 라일락이라고 알려주었어요. 매해 이 맘 때 즈음이 오면 우리는 길을 걷다 마주친 이 반가운 향기에 고개를 돌려 이 흰 꽃을 찾아내고야 말았고, 다가가 그 사이에 차례로 콧잔등을 스치며 추억을 묻혀왔었죠. 행복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내게 라일락의 꽃말은 당신이고, 한결같은 이 향기는 당신의 향기예요.
꽃이 가득 피는 제주도. 벚꽃 본 이야기도 유채꽃 본 이야기도 했는데 이 아가씨가 라일락 봤다는 이야기를 안 해서 어쩌면 이번 봄에는 누나가 라일락을 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 몰래 오늘은 라일락을 따왔어요. 꽃 꺾는 것 참 싫어하지만, 미안한 마음으로 가위를 들고 꽃송이 사이를 돌아다녔네요. 하필 오늘 비가 온다고 해서 마음을 졸였는데, 결국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봄비를 맞은 꽃잎을 매만지게 되었답니다.
빈 병 하나를 구해다 깨끗하게 닦아내고, 물을 조금 먹인 솜을 아래에 깔고서 라일락을 한가득 담았어요. 통풍이 되는 면으로 입구를 덮고, 겉에는 스티커 두어 장을 붙여놨어요. 입이 떡 벌어지게 근사하진 않지만, 서툰 솜씨에 금방 시들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향기를 한 번이라도 맡게 해주고 싶어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네요. 사랑과 미안함을 담아, 서로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 사랑해주기로 한 당신에게 이 꽃을 보내주고 싶었어요.
금방 당신을 보러 가겠지만, 이 꽃을 먼저 당신에게 보내 둘게요.
사랑해요.
2018.04.22 밤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