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튀김과 냉장고 속 주인공들.

스물일곱 번째 편지, 공군 군수 2 학교, 2016.07.18

by 김형우

To. 콩


군대에 와서 수첩을 들고 다니며 편지를 쓸 내용이나 메모해둘 것들을 적어두곤 해요. 어제는 부모님이랑 형이 면회를 왔기 때문에 적을 것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밤에 시간을 내서 한 줄 적어놓았어요. "왜 울고 그래요"라고.


통화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치고 힘들었던 날들 끝에 나랑 통화를 하면서 조금 힐링이 된 것 같아 다행이지만, 또 짧은 통화로는 다독여줄 수 없는 이야기가 가슴속에 남아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이제 갓 2개월이 조금 더 지난 고무신 생활이 그 전의 함께 있던 시간들과 얼마나 많이 다를지 걱정되기도 하고요. 씩씩하고 유쾌한 아가씨지만 누구나 가슴속에는 마음 여린 소심이 하나씩은 키우고 있는 터라 이곳저곳에서 모아 온 걱정과 상처들이 쌓여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외박 나가서 무슨 일 있었느냐고, 다 괜찮다고 잘했다고 해주긴 할 테지만 내 소심이도 고집이 조금 세서 걱정을 놓아주기 싫은가 봐요.


그래서 어떤 편지를 써줄까 하다가 그냥 보면서 웃고 재밌어할 만한 이야기나 적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효약은 못 되더라도 웃음은 언제나 썩 괜찮은 처방전이니까요. 오늘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갑자기 친한 형이 이런 질문을 해왔어요. "형우야, 네가 냉장고를 배경으로 애니메이션을 찍는다고 치자, 그리고 네가 등장인물을 다섯 개 고를 수 있다면 넌 뭐로 할 거냐?"라고요. 정말 뜬금없는 주문이긴 하지만 내가 형한테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빌린 대신 '픽사 스토리'라는 책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1분 정도를 고민해 출연진을 골라주었어요.


첫 번째는 파마산 치즈였어요. 뭔가 냉장고! 하면 떠오르는 아이였거든요. 우리 집 냉장고 문을 열면 오른쪽에 바로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내가 자주 쓰는 재료이기도 하고, 또 그 초록색 통과 빨간색 프린팅이 참 매력적이니까요. 아마도 이 Mr. 파마산 치즈는 치즈색이 감도는 콧수염에 상당히 세련된 말솜씨를 가진 노신사 캐릭터일 것 같아요. 주인공은 아니지만 조언을 하며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스토리 전개로 이어질 수 있는 개연성을 부과해주는 무게감 있는 역할이겠죠.


그다음은 식은 감자튀김이에요. 갑자기 뇌리를 스치며 떠오른 이 작품의 주인공인데,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다가 버려진 존재이기도 하고,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실패를 맛보고 돌아온 캐릭터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식이서 눅눅해진 감자튀김과 기름기에 절어있는 종이봉투. 비주얼적으로도 손색이 없죠. 아마 작품은 다른 캐릭터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음식으로 변모하게 되는 꿈을 꾸게 되는 감자튀김이, 결국 냉장고를 떠나 음식으로 만들어지는 내용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 둘을 잇는 캐릭터들은 아마 케첩, 우유 그리고 파프리카였어요. 케첩은 감자튀김의 영원한 짝이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냉장고 속으로 돌아온 감자튀김의 실패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미안해하는 캐릭터로 그려지면 어떨까 싶어요. 하지만 케첩은 여전히 많은 요리들의 파트너로 계속 냉장고 밖으로 불려 나가게 될 것이고, 아마도 감자튀김은 사랑받는 케첩의 모습에 부러움과 조금의 배신감을 느끼게 되겠죠. 우정에 틈이 생기는 장면들이 연출될 가능성도 있겠네요.


우유는 무궁무진한 잠재성을 가진 아이 같은 존재로 비쳤으면 좋겠어요. 때로는 수프가 되기도, 초코우유가 되기도, 시리얼에 부어지기도 하면서 수많은 음식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예요. 우유는 감자튀김이 다른 음식으로 만들어져 다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계속해서 암시해주겠죠. 감자튀김이 자신이 냉장고 안에 있는 유일한 요리된 음식이라는 자존심이 있어 요리되는 것을 기피하거나, 혹은 다시 요리되지 못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다면 우유라는 캐릭터가 그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네요. 또 우유 덕에 냉장고 문이 열리는 그 짧은 순간들은 매번 냉장고 속 모든 재료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심어줄 해프닝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마지막 등장인물, 파프리카입니다. 우리 콩씨는 아마도 예상했겠지만 파프리카는 당연히 악역입니다. 순수하게 스토리 작가가 선호하지 않는 친구이기 때문에 캐스팅되었지만 작품 속 파프리카는 신선함의 대명사이면서 패스트푸드인 감자튀김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캐릭터가 될 것 같아요. 감자튀김의 실패를 조롱하며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주체 중 하나가 되어주겠죠. 하지만 파프리카 역시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한 체(스토리 작가의 취향이 듬뿍 반영되어있습니다) 냉장고에 남겨져 있는 캐릭터로 역설적이게도 감자튀김의 아픔을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로 그려질 것 같아요. 둘이 함께 새로운 요리로 탄생하게 된다면, 클리셰이긴 하지만 흥미로운 결말이 되긴 하겠죠. 물론 파프리카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갈려진 상태로 투입될 거예요.


쓰다 보니 편지지 2장을 거의 다 써버렸는데 어떤가요? 재밌었나요? 아니면 재미있을 것 같나요? 누나도 한 번 딴짓을 하고 싶다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은근 재미있더라고요. 나도 후다닥 생각하고 편지를 쓰며 보탠 것이라 부족하지만 이런 상상은 즐거우니까요. 우울했던 것들, 지쳤던 것들은 가끔 내려두고 생각해보길 바라요. 5명의 냉장고 속 주인공. 슬프게도 이 편지가 누나 품에 닿으려면 다음 주나 다다음 주가 될 테니 숙제 시간이 많지는 않겠네요. 힘 내주세요.


가끔 힘들고 짜증 나는 일들이 찾아오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하루가 간혹 있더라도, 유쾌하게 딴생각을 해보며 이런 이야기 형우한테 해줘야지 생각하며 기다려주세요. 금방 나가서 안아주고 다독여줄 게요. 쭈욱 편지를 썼는데, 힘이 좀 날 지 모르겠네. 보내줄 수 있는 것은 편지뿐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 잘 기억하면서 힘 내주길 바랄 게요. 사랑해요. 화이팅.


2016.07.18 - 스토리 작가 형우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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