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여섯 번째 편지, 공군 서울공항, 2016.12.22
To. 콩 아가씨
이사를 했어요. 사실 이제 한두 번 한 것도 아니라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이번 이사는 조금 특별했던 부분이 있어 편지를 쓰네요. 1 내무실에 벌벌 떨면서 들어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 내무실. 내무실을 옮긴다고 환경이 특별하게 좋아진다거나 하진 않지만, 4 내무실에서 5 내무실로 넘어올 때는 거대한 자유의 날들이 기다리고 있어 다들 신이 나서 이사를 했습니다. 1 내무실에서 4 내무실까지는 생활관장이라는, 신병들과 갓 일병을 단 친구들을 도와주기 위해 함께 생활하는 병장들이 계신데 5 내무실부터는 정말 우리만의 세상이거든요.
이사를 할 때마다 새로운 생활관장님을 뵙게 되기 때문에 조금 긴장했었던 지난 내무실 변경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런 느낌도 없이 평온하고 차분한 기분으로 이사를 했던 것 같아요. 마치 파도 위를 떠다니는 주꾸미 같았달까요. 군번 순서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동기들과 헤어져 맞선임들과 살아야 하긴 하지만, 이미 맞선임들과는 평화롭고 하극상 충만한 일상을 살 자신이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정말로 이사를 해보니 아무 문제가 없었죠. 딱 하나, TV가 망가져 있다는 것만 빼고요.
세상이 이토록 조용하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깨달은 하루였어요. 음악 프로그램을 틀어두며 시작하는 아침도, 퇴근하며 틀어두는 영화도, 자기 전에 틀어두었던 드라마도 없는 적막함. 이사한 날도, 오늘도 비가 내렸는데 TV 소리를 덜어낸 공간을 채우는 빗소리가 얼마나 고즈넉하던지. 괜찮은 자장가긴 했지만 덕분에 상당히 심심해져 버린 관계로 다시 책을 많이 읽게 되었네요.
그동안에도 매주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많이 읽고 있긴 했지만 내무실 분위기가 더없이 차분해지고 나니 책이 조금 더 빨리 읽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 물론 이제 매주 금요일, 토요일에는 드라마를 보러 다른 내무실에 원정을 가야 하겠지만 과자라도 하나 사들고 가면 받아주지 않을까요.
날이 추워지고 간간히 눈발이 흩날려 세상이 하얗습니다. 차 앞 유리에 성에만 안 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역시 무리겠죠. 감기가 유행이라고 해요. 춥지 않게 잘 껴입고 다니고 이불도 따뜻하게 덮고 자길 바라요. 공부할 때는 내가 준 매트 잘 켜두고, 요즘에는 길에 살얼음이 껴서 미끄러지기 쉬우니까 자전거 타고 싶어도 머릿속으로 고민 한 번 해봐 주세요.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오늘은 그 정도만 바라며 잠에 들까 싶네요. 조용한 밤이에요. 잘 자요.
2016.12.22
*저를 제외한 모든 편지 수령인들의 이름은 가명이나 애칭, 혹은 평소 좋아하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친구의 경우, 콩/누나/아가씨 등을 사용할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