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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K Jun 29. 2020

첫 구매


  보통 첫 구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취직 후 첫 월급으로 구매한 물건들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초등학교 때 구매한 것들이 기억에 남는다. 물론 이 기억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도 기억 속에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늘 학교 근처에 있는 문방구 앞에서 하루를 보냈다. 형형색색의 학용품들과 값 비싼 장난감을 구경하고, 문방구 앞에 있는 게임기를 한참 동안 구경하는 게 그 시절 초등학생의 일과 중 하나였다. 어쩌다 학용품을 구매하는 날이면 잠을 설쳤다. 날이 밝자마자 쏜살같이 등교해 학용품을 구매하고 작디작은 책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언박싱을 했다. 초등학생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자주 가던 문방구의 이름은 미미 문방구로 왜 이름이 미미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초등학생의 눈에는 OO네 문방구보다 훨씬 멋져 보였다. 젊은 부부가 운영했던 미미 문방구는 이름만큼이나 특별한 마케팅 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구매 금액만큼의 쿠폰 스티커를 주는 것이었다. 쿠폰 스티커는 중국집 포도알만 해당되는 줄 알았던 나에게 문방구 쿠폰 스티커는 꽤 충격이었다. 미미 문방구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초록색 둘리 모양의 스티커를 줬다. 15개를 모으면 문방구에서 직접 만드는 사과잼 와플과 교환할 수 있었다. 물론 와플을 직접 사서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스티커로 교환해 먹는 와플이 더 꿀맛이었다. 어쩌면 고단수의 마케팅 기법으로 잼을 더 많이 넣어줬을지도 모른다. 나는 미미 문방구의 마케팅에 빠져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용돈이 생기면 늘 문방구로 향했고 그때부터 구매에 대한 욕구가 점점 샘솟기 시작했다. 문방구 아줌마가 내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드나들었다. 우리 엄마는 문방구에 돈을 다 갔다 준다며 싫어하셨다. 어느 날 미미 문방구로 출근 도장을 찍으니 새로운 물건이 놓여있었다. 바퀴가 두 개 달린 은색 킥보드였다. 동네에서 킥보드를 타는 형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없었다. 문방구에 놓인 은색 킥보드는 정말 멋졌다. 내가 갖고 있는 어린이 자전거보다 멋졌고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었고 내 머릿속에는 은색 킥보드가 떠나질 않았다.


  어떤 이유로 오셨는지 모르지만 미국에 살던 큰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왔다. 마침 아빠가 하던 사업이 망해 반지하에 살고 있었던 때였다. 미국에서의 삶도 퍽퍽했을 큰 아버지는 나에게 용돈이라며 뻣뻣한 10만 원 수표를 쥐어주셨다. 엄마가 봤더라면 그 돈은 맡아둔다며 빼앗아갔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큰 아빠와 나,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고사리손으로 받아둔 10만 원 수표는 재빠르게 내 주머니로 향했다. 엄마가 혹시나 알아차리지 않을까 나는 자꾸 주머니에 손을 넣어 10만 원의 존재를 확인했다. 큰 아빠는 할머니네에서 당분간 지낸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음에 또 보자며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큰 아빠를 배웅하고 나는 곧장 문방구로 향했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10만 원이 주머니에 있는지 계속 확인하면서 문방구에 갔고 킥보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10만 원을 내밀었다. 젊은 주인아줌마는 이렇게 큰돈이 어디서 났냐며 나에게 물었다. 큰 아버지가 준 용돈인데 엄마가 사도 된다고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쉽게 통해 그토록 갈구하던 은색 킥보드가 나에게 생기게 되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더 큰 사고를 쳤다. 은색 킥보드를 타고 할머니네로 간 것이다. 왜 할머니네로 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대답은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갔다고 했지만 사실은 큰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는 미아삼거리에 살았으니 할머니가 있는 신당동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경동시장을 거쳐 적어도 2시간 이상이 되는 거리를 초등학생 혼자 킥보드를 타고 신당동에 도착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었다. 돌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온 길이 돌아가기엔 너무 멀었고, 엄마에게 킥보드의 존재를 알리기에도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굽이진 골목길을 지나 할머니네에 무사히 도착했다. 통 큰 초등학생의 은색 킥보드가 나의 첫 구매였다. 그 후 성인이 된 후 어떤 구매도 첫 구매의 설렘과 떨림을 능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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