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면장갑과 흰색 쪼리
며칠째 비가 온다. 어김없이 출근을 준비한다. 빗물이 튀어도 티가 나지 않는 검정 슬랙스와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외투를 챙겼다. 그리고 회색 신발을 신었다. 우산은 검은색 장대 우산을 챙겼다. 평소라면 3단 접이식 우산을 챙겼겠지만, 매일 나를 위해 비를 맞는 3단 우산도 좀 쉬어야지.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날이 좋은 날보다 비가 올 때 고소한 냄새가 더 진해진다. 빵집의 유혹을 뒤로하고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다. 왼편에 서있는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흰색 면장갑을 끼고 검은색 손잡이를 잡았다. 코로나가 끝나는 마당에 꽤나 예민하시구나. 나는 예민한 아주머니의 옷깃이 닫지 않게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걸어서 내려간다. 앞에는 흰색 쪼리를 신은 여자가 있다. 쪼리가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검색해본 브랜드의 신상 쪼리다. 아직 상품이 안 풀렸을 텐데 그 제품이 맞을까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그 순간, 쿵쿵 쾅쾅 굉음이 들린다. 내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소리다. 한 순간, 눈 깜짝할 사이였다. 왼손에는 아이폰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장대 우산이 들려있었으니 뭔가를 잡을 여력이 없었다. 그대로 5, 6개의 계단을 에스컬레이터 속도보다 빠르게 내려왔다. 일어나려고 애를 써도 일어날 수 없었다. 엉덩이에 가해진 충격은 민망함보다 컸다. 눈 앞에 거대한 악어의 이빨 같은 에스컬레이터 톱니가 보인다.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흰색 쪼리를 신은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코로나 시대에 손을 내민 것에 고맙지만 손을 잡기에는 거리가 멀다. 나는 자력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갑자스럽게 일어난 사고에 한참을 서있었다. 미끄러져 내려갈 때의 생각은 나지 않고, 흰색 면장갑과 흰색 쪼리만 머릿속에 맴돈다. 인터스텔라에서 책이 떨어졌던 것처럼 미래의 누군가가 나에게 신호를 줬던 것 일까. 더 나이를 먹고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꼭 손잡이를 잡고, 신발을 조심해라라는 메시지. 그것보다 오늘 피티가 있었는데 액댐했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