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잠재우는 시각 정보 디자인
인간의 경험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상호작용들이 차곡차곡 쌓여 경험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각 개인이 맞닥뜨렸던 상황은 모두 다르다. 지구상에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일생동안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단연코 한 명도 없다. 이런 점에서 <경험의 함정>을 쓴 로빈 M 호가스는 경험이란 개인적이면서도 삶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한 개인이 어떤 판단을 내리는 데는 수년에서 수십 년의 경험들이 응축되어 반영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던 내면의 깊은 생각에서 사람의 경험에 대한 퍼즐이 맞춰진다.
출근길 지하철. 한 청년이 바삐 지하철을 탔다. 열차의 문이 닫힌 뒤 주변의 시선이 갑자기 그에게 쏠린다. 영문을 모르는 청년은 주변의 시선을 느끼자 당황해한다. 옷매무새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급하게 확인한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핸드폰을 가리키자 그제야 빠르게 핸드폰 측면 버튼을 수차례 누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깜빡하고 볼륨을 최대로 켜놓았던 한 청각장애인 청년의 이야기다. 이 청년은 그날의 에피소드 이후로 외출 시에 습관적으로 핸드폰 측면에 있는 볼륨 버튼을 낮추는 행동을 반복한다. 인터뷰를 해보면 꽤 많은 농인, 난청인들이 이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나 골목길 등에서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게 된다. 불안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에 대한 염려나 내가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안전사고가 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한 염려다.
한 청각장애인 부부의 가정에 방문했더니 태블릿 PC가 거실에 놓여 있었다. 사실 주목하여 보지는 못했다. 가끔 충전을 위해서나 필요할 때 쓰기 위해 거실에 태블릿을 놓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청각장애인 부부에게 태블릿 PC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다. 알고 보니 아파트 안내 방송이나, 문 밖에서 나는 소리 등을 자동으로 감지하고 소리가 문자로 변환되는 것들을 매번 확인하기 위해 거실 가운데 놓은 것이었다.
들을 수 있는 청인은 집 안에서 소리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초인종 소리나 문 여닫는 소리를 통해 누군가가 집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물 흐르는 소리를 통해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소리로 정보를 습득하기 어려운 농인, 난청인에게는 정보를 시각적으로 잘 전달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
여기서 시각적 정보란 문자, 이미지, 빛 등 시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말한다. 불이 나면 빨간색 LED 경고등이 깜빡임으로써 위험 신호를 알리거나,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하면 빨간색으로 글씨가 바뀌면서 다시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메시지가 뜨는 것처럼 말이다. 작년 말 인터뷰를 진행했던 농인 건축가 로버트 니콜스는 시각적 정보를 통해 공간 내 변화를 인지할 수 있는 요소들을 집 안 곳곳에 배치했다. 특히 현관문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 조리 공간에서는 초인종을 눌렀을 때 깜빡거리는 점멸등을 설치해 정보를 획득할 수 있게 설계했다.
정보를 시각적으로 알려준다면 최대한 빠짐없이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주로 문자 정보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만나본 농인, 난청인들은 취사선택을 직접 할 수 있다면 어떤 정보든 최대한 많이 알고 싶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들은 정보를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폭우로 인해 아파트 지하에 있는 차를 모두 빼야 한다던가, 화재로 긴급 대피 상황이 발생한다던가. 여러 돌발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은 살면서 부지기수이지만 위험신호는 대부분은 음성정보로 전달된다. 누군가의 외침, 안내 방송 등으로 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태블릿으로 확인하는 정보는 단순한 메시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