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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래 Feb 29. 2024

코인 세탁소

보송하고 따뜻한 움직임

집 세탁기와 연결된 수도가 고장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미루고 미뤄왔던 빨래를 하기 위해 비 오는 날 코인 세탁소로 향했다.


첫 번째로 들린 세탁소는 집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내가 가져간 세탁물의 양은 많지 않았는데 대형 세탁기 두 개가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초대형 세탁기를 쓰기에는 비용이 아까워서 세탁소를 나왔다.


두 번째로 들린 세탁소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세탁소인데 이곳을 첫 번째로 들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근무지와 가깝기 때문이다.

공황 발작이 시작되고 나서 근무지 근처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게 됐다. 근무지 근처에 가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고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까 겁이 났다. 공황 발작이 나타나던 장소는 본능이 기억을 하고 있어서 그 장소에 가면 어김없이 공황발작이 시작되곤 했다. 휴직을 하고 나서 그 동네 근처에는 아예 가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게 됐다.


'비도 오고 날도 어두우니 아무도 없겠지'하는 마음으로 간 세탁소에는 내 바람대로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세탁물들을 넣고 생각했다.

'이 빨래가 다 돌아가고 건조기를 다 돌릴 때까지 아무도 안 왔으면 좋겠다.'



동그란 통 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물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가만히 앉아 멍 때리기 좋은 장소가 여기 있었다.

적당한 소음과 함께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한참 동안 세탁기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방 속에 챙겨 온 시집 한 권을 꺼냈다.

언젠가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면 읽겠노라 아껴두었던 책을 세탁소에서 읽게 됐다.

시 한 편을 읽고 세탁기를 한 번 쳐다봤다.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는 우리가 제법 멋지다고 생각했다.



세탁이 다 된 빨랫감을 건조기로 옮겼다.

고온에 건조를 하니 생각보다 건조가 빨리 됐다.

보송하고 따뜻해진 빨랫감을 만지는 느낌이 좋았다.


빨래를 하는 1시간가량의 시간 동안 사람은 오지 않았고 비는 계속 왔다.

코인 세탁소에서 차가 있는 지하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따뜻한 빨랫감이 손에 있어서일까.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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