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물폭탄을 쏘는 것처럼 비가 내리더니
이제 겨우 정오가 지난 시간인데도 피부에 닿는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턱을 괴고 책상 앞에 앉는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마음 한편에 재워둔 이야기들이 많은데,
안 간데없는 저 바람은 어떠할까?라는 상상에 빠져본다.
세상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바람이라
내 맘을 알아차렸는지 나를 슬쩍 건드린다.
내게 자신의 세상 유람한 얘기라도 들려주려는 것 같다.
아니, '나와 함께 내가 가는 곳으로 가보지 않을래?'라고
대놓고 내 귀에 속삭거린다.
그래, 바람과 함께 먼 여행을 떠나 볼 거야.
아, 나도 마음속의 온갖 찌꺼기 다 날려버리고
저 바람처럼 거칠 것 없이, 아니 나도 바람 되어
온 세상을 휘이휘이 저으며
새털 같은 가벼운 몸으로 아마존의 강가로,
저 아프리카 미지의 숲으로,
때로는 사하라의 모래폭풍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볼 거야.
나는 어느새 바람이 되어 온갖 종류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들이 끝 간 데 없이 피어있는 곳을 지나, 그 향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보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한 무리의 양 떼를 몰고 다니는 목자들이 쉬고 있는 넓은 평원에 잠시 머물며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이야기들을 몰래 엿듣기도 했다. 그곳에서 예쁜 구름을 몰고 다니는 바람에 이끌려 그 구름 속에서 한참 노닐다가 밤의 요정들이 선물로 준 검은 옷을 입은 구름들이 비구름이 되어 가는 길을 따라 나도 다시 세상에 떨어졌다. 바람이 나를 놓아버린 것일까?
그런데 이번에는 갖은 물고기들과 형형색색의 산호들이 살고 있는 바닷속이다!
나는 오색 산호들이 꿈꾸듯 흔들리며 춤추는 것을 바라보며 은빛, 금빛, 에메랄드 빛, 그 밖의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하고도 어여쁜 색의 물고기들과 바닷속 깊은 곳에서 유영하면서 그곳의 그림 같은 풍경에 매혹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심연으로 들어가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가항력', 말 그대로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온몸에 힘을 주어 저항을 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은 채 끝을 모르는 심연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아니, 무슨 대낮에 어떤 꿈을 꾸었길래 온 천지가 진동하도록 고함을 지르는 거야?"
남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꿈이었다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내가 한 말,
"이게 뭐야? 여행 계획이라도 잡아야 하나? 요즈음 와서 매일 집에만 틀어 박혀 있으니 스트레스가 쌓여 이런 터무니없는 꿈을 꾸잖아?"
갑자기 남편의 화들짝 놀란 얼굴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간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또 혼자 밥 해 먹으며 며칠을 살아야 하나 그런 마음이 담긴 표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