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아니,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쓰긴 쓰되, 절대 보관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모든 일에 낙관적인 편인 나이지만, 유독 일기에 대한 견해만큼은 다소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일기의 정의는 "날마다 생긴 일, 느낌등을 적은 개인의 기록"이다. 물론 나도 이 범주를 비껴난 일기를 쓰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글을 쓸 때는 어떤 느낌으로 시작하느냐가 참 중요하다. 그 가끔 쓰는 일기를 나는 아주 우울하거나 , 좀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쓰는 경향이 있다. 다분히 분풀이 적인 마음으로 쓰는 글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그 일기라는 것의 내용이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일기의 초입 부분은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 그러나 글이 중반부쯤 진입할 때면 나의 감정 혹은 감성은 도를 지나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글을 끝맺어야 할 부분에 와서는 사건의 전개가 너무 복잡다단해져서 지리멸멸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혼자 보고 말 글일지언정 그래도 무얼 시작하면 성격상 끝을 보아야 하겠기에 중도에 그만두지는 못하고, 감정의 추스름 없이 그것에 끌려 다니다 보면 이런 날엔 새벽 세네시 후에 잠자리에 드는 건 기본이고, 더러는 책상 앞에 앉아 별 명분 없이 뜬눈으로 지새야 할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감성의 탈을 쓴 우울의 결과는 이게 끝이 아니다. 복잡한 심리분석을 곁들인 사건일지이거나, 삼류단편 소설을 방불케 하는 나의 짧지 않았던 밤샘 작업의 산물이 서서히 파국을 맞이할 위태로운 시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동녘 창을 통해 미명이 슬금슬금 도둑처럼 나의 방으로 잠입할 때쯤이면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이성이 기지개를 켜는 것과 그 파국이란 것은 무관하지 않다.
미명과 함께 서서히 깨어난 나의 이성은 내게 명령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밤새워 쓴 그 유치 찬란한 일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겨 쓰레기통에 쑤셔 박아 버리라고..., 이제 미명에 실려 찿아들어온 한줄기 새벽바람에 더욱 막강해진 나의 이성이 내리는 명령에 나는 굴복할 외의 다른 핑계를 찾지 못한다.
한눈을 감고 보기에도 부끄럽고 민망한 나의 일기여!,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갈가리 찢김을 당하지 않았을 나의 불쌍한 일기여! 하지만 네가 아니었다면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르는 네 주인의 슬픔으로 아린 마음을 거뜬히 회복시켜 놓고 장렬히 최후를 맞이하였기에 너의 임무는 이로써 끝이 났다. 너는 다시 네 주인의 기억의 방으로 귀환하여 고이 모셔질 것으로 위로받을지어다. 그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너의 주인이 몹시 우울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끼는 날에 너는 사망 전과 매우 흡사한 모습으로 환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에도 너의 수명은 밤에 쓴 연서가 그러하듯 또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