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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동화 1

내 눈에 콩깍지

by 해진

하루는 '사랑'이 하도 세상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정의에 대해 분분하길래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궁금해져서 잘 차려입은 준수한 청년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고 세상 유랑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지난해 흉년으로 쌀독마저 비어버린 한 시골의 어느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집이었다.


사랑은 그 농부에게 물었다.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그에게 했더니 그는 낯선 사람의 이 뜬금없는 질문에도 서슴없이 "배고픈 사람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은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질문을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미리 마법을 걸어 놓았기 때문에 농부는 아무 의심 없이 그렇게 툭 내뱉었다. 사랑은 원래 마법과 같은 존재이기에 그런 일 따위는 쉬운 일이었다. 사랑은 무엇이든지 해줄 힘이 있는지라, 굶주리고 있는 농부의 가족에게 근사한 만찬을 제공하고 그들이 만족한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또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다가 사랑은 어느새 번잡한 도시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에서 그는 우연히 한 아름답지만 약간 허영끼가 있어 보이는 여인을 만났다. 사랑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농부에게 했던 같은 질문을 했더니, 그녀는 사랑의 훤칠한 외모에 끌렸던지 조금 수줍은 듯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사랑은 나에게 멋진 가방을 선물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은 자신을 단번에 정의하는 그 말에 너무나도 의아했고 그것이 아무리 비싸고 좋은 가방일지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기엔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이름은 사랑이므로 그녀가 한눈에 반할만한 세상에서 제일 멋진 가방을 선물로 주고 황홀감에 빠져있는 그녀를 뒤로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이번에 그가 들른 곳은 어느 작곡가의 약간은 허름한 사무실이었다. 사랑은 그 작곡가와 인사를 나눈 뒤 가까이 다가가 이번에도 농부와 여인에게 했던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이상했다. "눈물의 씨앗"이라는 거다. "내가?" 사랑은 그 말에 깜짝 놀랐지만 그 작곡가가 '눈물의 씨앗'이라는 주제로 밤을 새워가며 만들어 놓은 곡을 들어보니 정말 근사했기에 곡의 제목만 그렇게 지어 놓고 그 곡에 어떤 가사를 붙여야 할지 고심하는 작곡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 사랑은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그 남자의 머릿속으로 몰래 들어가 그의 뇌의 어떤 부분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 곡에 맞는 주옥같은 가사들을 쏟아냈다. 미칠 듯이 기뻐하는 작곡가를 뒤로하고 사랑은 방금 만들어진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흐뭇한 마음으로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자신이 '눈물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사랑은 자신의 작사 실력에 흡족해했던 작곡가의 환희에 찬 얼굴을 생각하면서 좀 더 길을 가보기로 했다. 한참 길을 가다 날도 저물고 피곤해져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어져 갈 무렵 사랑은 숲 속에 있는 한 외딴집에 도착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는 할머니 한분이 살고 계셨는데 그분은 기꺼이 사랑에게 하룻밤 편히 묵어 갈 수 있는 정갈하고 아담한 방을 하나 내어 주시고,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도 장만해 주셨다. 그는 그러한 할머니의 친절하고 따스한 마음이 또 하나의 다른 그의 이름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랑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꼭 같은 질문을 그 할머니에게도 했다. 피곤하기도 해서 그냥 자버릴까 하다가, 할머니께서는 그 질문에 과연 어떤 답을 하실까 궁금해서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다른 건 다 흘려 들었는데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과 결혼이라는 걸 했는데 첫 만남에 그만 서로의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 버렸는지 평생을 같이 하게 되었고 그것을 후회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갑자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셨다.


사랑은 많이 놀랐다. 처음 본 사람과 평생을 같이 할 수 있다니... 사랑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힘이 이렇게 막강할 수가 있다니!


그는 할머니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신 후 그분이 들려주신 이야기, 말하자면 할아버지와 평생을 함께 지내면서 서로를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면서 같이 키워온 그 마음을 담은 수많은 사연 자체가 사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은 여기에서 자신의 짧은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쉬지 않고 그를 호출해 대는 바람에 그는 더 이상 길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야 하는 본연의 업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여행에서 새로 배운 말 중에 '(눈에 씌워진) 콩깍지'라는 귀여운 표현이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것을 자신의 이름을 대신한 별명으로 자주 쓰기로 했다. 누군가의 눈에 씌어진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아서 평생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자신이 기꺼이 사람들의 눈에 콩깍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Image by Michael Fen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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