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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대한 자유

'살짝 내비치기'가 주는 이득

by 해진

우리는 타고난 성품대로 행동하고 살아간다. 특히, 말에 대한 한 인간의 태도는 그 사람의 인간성을 여실히 드러낼 때가 많이 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당장 비워 내지 않으면 속이 불편하기라도 한 듯 하루종일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루 해가 다 가도록 말 몇 마디 하는 것조차도 버거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우리가 매일 쏟아내는 말들이 어떤 내용이든 기본적인 '말에 대한 자유'는 누구나 누리고 살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러하듯이 양극단으로 흘러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말을 할 자유가 있다고 해서 매일 다량의 말을 거르지 않고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것도, 속으로 품은 의견이 있는데도 입을 꾹 닫고 살아서 입안에 곰팡이가 슬 정도가 되는 것 그 모두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남에게 다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 없이 흘리고 다니는 말들이 후일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부메랑이 되어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릴 경우 과거에 생각 없이 발설한 말들을 주워 담아 그에 대한 변명을 하고, 그 일을 수습하려 해도 그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려면 기억력도 비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당혹스러운 일을 피하려면 평소에 말을 줄이고 때로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는 지혜도 필요하다. 자신에 대한 것을 너무 노출하면 나쁜 소문이나 험담의 대상이 될 확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별생각 없이 한 말에 어떤 사람의 아무 악의 없는 익살이 더해져 그것이 돌고 돌아 나의 명예를 크게 훼손시킬 수도 있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패러디라는 형태의 코미디 아닌 코미디가 많은 사람들의 취향과 맞아떨어져 인기가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이런 것들에 휩쓸리지 않고 사람들이 보여주는 말이나 행동의 이면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어서 이런 일로 오판을 하는 일이 적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평범한 인식을 지닌 대중이므로 이런 사람들은 단지 다수라는 힘 하나로 소수 지혜자들의 판단을 무시하고 깔아뭉개려는 경향이 있다. 그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때로는 현실을 왜곡하여 어떤 일이나 사건의 실상을 완전히 가려버리거나 덮어버리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또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혼자의 힘으로는 그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는 무력한 부류의 사람들이므로 무리 지어 다니며 아무 죄가 없는 사람에게 언어의 린치를 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행위를 '행복한 수다'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너무나 무력해서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용기조차 없으면서 무리 지어 다닐 때는 어디에서 힘이 나는지 그 힘을 모두 자신들의 발성기관에 실어 그런 무모하고, 생각하기에 따라 끔찍하기까지 한 짓을 단순히 재미 삼아 저지른다.


모든 다수의 횡포는 처음에는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말 많은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다로 입에서 또 다른 입으로 이어져 전해지다가 그 떠도는 말들이 어떤 사건으로까지 비화되어 한 개인 또는 그 개인의 가정을 완전히 붕괴시키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현실에서 대중매체를 통해서 종종 목도하기도 한다. 그 누구라도 간혹 그런 무리에 동조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다. 때로는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양심이란 것을 잠깐 자신의 비밀을 보관하는 서랍 속에 은밀하게 넣어두고 이런 무리에 합류할 때가 있다.


내가 한 말에 명백한 실수가 있었다거나, 정말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을 때는 마땅히 그에 합당한 제재나 법의 심판이라도 달게 받는 것이 옳겠지만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서 억울하게 당할 때가 많은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것을 판단하는 잣대가 우매한 대중의 손에 있을 때에는 대책 없이 뭇매를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언어의 오용과 과용으로 가해지는 집단폭력을 피해 가려면 우리는 우선 평소에 우리가 하는 말들을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방종이다. 혀를 구속하는 능력이 사라지면 그 혀의 소유자에 대한 신뢰도 사라질뿐더러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로 인해 패가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이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떨 때 우리는 마음속의 뜻은 명백하나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의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친구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집안 어른들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서, 직장상사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소위 말하는 또래 압력(peer pressure)으로 인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집단에서 분리되지 않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 밖의 수많은 이유로 우리의 입은 우리의 생각을 발설하는 최후의 통로로서의 구실을 상실하고 말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말에 대한 자유의 상실'이라는 난제에 직면한다. '언론의 자유'라는 말은 좀 더 큰 사회적인 맥락에서 사용하는 말이므로 여기에서 사용하기는 부적절 하기에 그냥 '말에 대한 자유'라고 한 것이다. 어쨌든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나 명분으로 마냥 안전하게 내 삶을 지켜 나가는 것에 몰두하여 완전히 입을 봉하고, 그래서 미어터지는 속을 부여잡고 대책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라면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현명한 삶의 태도일까?


그럼 이런 경우 마냥 그냥 참기만 하는 것은 어려우니 한 가지 방편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말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꼭 해야 할 때는 내속에 있는 생각을 '살짝 내 비치는' 정도로만 하면 어떨까? 적어도 내 마음의 숨통에 미세한 배출구라도 만들어 주자는 말이다. 숨통을 막아 놓으면 본인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표현이 지나친가? 아무튼 그렇게라도 하면 상대방에게 나의 적의를 들키지 않고 내가 말한 결과에 대해 크게 비난받는 일 없이 수월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사람들로부터 약간의 주목도 받을 수도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도 엿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당신들의 말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이런 방법으로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들의 관심을 살짝 다른 곳으로 유도해 우선 내가 받을 수 있는 비난의 화살을 최대한 피하고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럴 때 내 뜻을 다른 사람에게 관철시키기 위해 완곡하면서도 카스테라 처럼 부드럽고, 달달하면서도 폭신한 표현을 쓰는 것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은근히 녹여 넣어 그 말을 듣고 있는 상대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은 어떨는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속이 울렁거린다. 나도 못하는 짓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고 권유하는 꼴이라니...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실현하는 데는 고도의 수완이 필요할 때가 있어서 평범한 지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결론은 뻔하다. 나의 '말에 대한 자유'를 구속시키고 싶지 않다면 언제나 말을 가려서 하고 생각 없이 많은 말을 자주 쏟아내지 않는 방법 밖에 없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은 소리잖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라는 존재, 이럴 때 참 허망하다. 글의 제목만 그럴듯하지 결론은 진부하다. 이러니 옛 현인들이 한 말씀들을 지금에 와서도 결코 패스할 수 없을뿐더러 반복해서 되뇔 수밖에 없는 거지!



귀에 또 다른 딱지를 앉혀 드려서 죄송합니다.

- from Haejin


The Gossips 1927 Charles Frederick Ramus (American, 1902–1979) America lithograph Gift of The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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