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공유의 수단
그저 마음이 고요한 상태라야 글을 쓸 수 있지 않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것이 맞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말은 꼭 맞는 말은 아니다.
내 경우는 이러하다. 글을 쓰려면 약간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하면서, 마음에는 너무 뜨겁지 않은 불꽃이 튀어야 하고, 가슴은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으면서 들뜸은 없어야 한다. 이렇게 나의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엔진이 이런 현상들을 동반하면서 발동하지 않으면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있기조차 어렵다. 내가 무슨 고귀한 글을 쓰는 것도 아닌데도 적어도 이런 상태가 되지 않으면 도저히 글 한자도 생산할 수 없는 것이다.
' 여유작작'이란 말은 참 좋은 의미를 지닌 말이지만 늘 그런 상태에 익숙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이 무슨 결핍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알고 채워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작가는 그 마음에 결핍이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 스스로 그 결핍을 채우려고 늘 고군분투의 삶을 살다 보니 동종의 삶을 힘겹게 꾸려나가는 정신적으로나 마음적으로 목이 마르고, 배도 고픈 다른 사람들의 삶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 간의 감정의 소통과 공유가 시작될 때 비로소 작가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정신적인 기아상태에 처했을 때 적어도 구원의 동아줄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때부터 글을 쓰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작가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글이 유명세를 타서 호의호식하려는 자들은 일찌감치 다른 효율적인 일을 찾아 나서는 것을 추천드린다.
내 말은 작가라고 해서 모두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괴테나 쇼펜하우어 같은 위대한 작가들은 경제적으로 꽤 부유한 사람들이었지만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좋은 글을 남겨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귀감을 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필수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고독이나 사랑의 부재 혹은 그 밖의 결핍으로 처절해진 우리 인간의 참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그들에게 없었다면 그들이 과연 그런 류의 좋은 글들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을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위대한 작가들이 밟아온 삶의 경로를 그대로 추적해서 따라간다고 해서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위대한 자들은 그 위대함 자체의 산물인 것이다. 뱁새가 황새의 큰 발걸음을 어찌 따라가겠는가. 모든 작가가 위대한 문필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글을 쓰는 자체가 몰입을 유도하면서 그 안에서 인생의 또 다른 재미
를 탐색해 나아가고 있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흥미진진한 일이고 보람 있는 일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나를 이렇게 모르고 있었다니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일 년 전부터 집에서 환자가 된 남편을 돌보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산책도 하고 다행스럽게도 큰 일상의 변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남편이 화장실도 혼자 가고, 식사도 잘하고 보행에도 별 지장이 없어 산둘레길을 걸을 때 동행해 주기도 하지만 그의 상태가 병에 걸리기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으므로 그 사람이나 나나 그전보다는 제한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틀림이 없다. 다른 일상은 다 그대로인데 내가 늘 그 사람에 대해 주시해야 하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해졌다는 것과 함께 멀리 여행을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서 그러한 것들이 좀 아쉬울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것들에 대해 동경하거나 가치를 둘 만큼 미련이 남은 것도 아니므로 오히려 이러한 계기가 나를 시간 나는 대로 책상 앞에 잡아매이게 만들었으니 나의 조그마한 불운이 나 자신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행운을 만들어 내었으니 인생은 참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글을 쓰다 보니 내 안에 있는 생각들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고 비록 졸필일지언정 지금 쓰지 않으면 나의 뇌리 속에 존재하는 생각들은 어느새 어떤 보이지 않는 기류를 타고 모두 나로부터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조바심이 생겨나기 시작해서 글쓰기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어떤 영감이 떠오를 때 그것을 메모장에 기록해 놓는다 하여도 시간이 나로부터 달아난 거리에 정비례해서 그 생각이란 것이 술에 물을 탄 것처럼 맹맹해지기도 하므로 이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한 긴박감도 한 몫한 것 같다. 사실 나는 메모하는 습관도 없다. 글연습을 한 적은 애써 떠올리려고 해도 거기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대학원 시절에 열심히 학과에 관한 에세이만 써댄 것이 전부다. 그것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 그냥 전공이니까.
나에게 있어서 돈이 되는 직업을 만들어 준 나의 전공인 영어영문학과 영어교육학은 나의 물질적인 생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출강을 나가는 회사원들의 영어회화 능력을 점수로 평가하여 회사상부에 보고하는 일이 어느 날엔가부터 점점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와 별 관련도 없는 세미나에 참석해야 한다는 핑계로 나와 친해진 학생들과 나를 계획된 고의로 분리시킨 뒤 미국으로 가서 한 달 동안의 도피 생활을 즐겼다. 한마디로 참 좋았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이 직업에 대한 커리어를 나 스스로 종결했다. 이 직업에 대한 큰 불만은 없었지만 명백히 돈이나 밥이 되는 일이라면 다 재미가 없는 일로 간주했던 나의 치기스러운 성향이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돈의 효용가치 자체에 의문을 품은 것은 아니다. 나, 지금도 돈 좋아한다. 다만 그 돈이란 놈이 나의 소중한 자유를 얽어 놓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내가 택한 직업 중에 가장 돈과 많이 연결되었던 이 일도 나에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이런저런 사건들이 모여서 그중의 어떤 불씨가 나를 글을 쓰는 길로 인도했는지 나도 잘 모른다. 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지금도 내 곁을 변함없이 지키고 있는 남편의 병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육신이 건강했을 때도 지금의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도 나와 하나밖에 없는 딸의 안녕을 위해 변함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이제는 내가 그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한탄하면서 매일을 의미 없이 소비하면서 지낼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이런 일련의 불운에 내게 없었더면 절대로 나는 펜을 잡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이 취미, 저 취미 사이를 오가며 즐기면서 살다가 그것이 인생인 줄 알고 살다가 종내에는 허무하게 인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이 타인들이 볼 때는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의 지금의 이 상태에서는 적극적인 소통과 공유의 수단이다. 다만 그런 일이 아직은 미숙한 단계에 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하루하루 이 소통과 공유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도 별 의미 없는 교제와 행위들로 채워진 지난날들에 대한 뼈아픈 반성도 가끔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나와 결도 많이 다르고 별 깊은 대화도 나눌 수 없었던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보낸 시간들이 다 헛된 것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그들도 그들 만의 리그가 있을 것이고 애초에 불성실했던 그 리그 속의 일원이었던 나의 역할은 이제 끝이 난 것일 뿐이다. 이제는 내 삶에 또 다른 분야에서 불을 지펴 보고 싶다. 내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쓰다 보니 내 얘기가 길어졌다. 내가 왜 글 쓴 사람이 되었는지 설명을 하려다 보니 이런 별 쓸모없는 말들이 곁들여진 것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해해 주리라 생각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불꽃은 원래 뜨거운 것이어야 하는데 '뜨겁지 않은 불꽃'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다만 이것을 글에 대해 적용시켜 설명해 볼 수는 있다. 불타는 정열이나 맹목적인 동기로만 이루어진 글은 그 열이 식은 다음에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유치하고 두서없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식의 후회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아무리 시대적 정신을 반영한 열렬함으로 글을 썼다 할지라도 이성의 개입이 차단된 글은 나 혼자 만의 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 힘들지 않을까. 즉 '소통과 공유'에서 멀어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글을 쓸 때에는 정신의 화력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태생적으로 두근거림을 지니지 않은 사람 역시 글을 쓰는 것이 쉽지가 않을 것이다. 작은 일에도 마음이 설렐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마음이 순수해서 별 가감 없이 남의 희로애락을 내 경험처럼 가져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자신만의 감성을 더하여 그 경험들을 글로 엮어낼 수 있다. 즉, 다른 이들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마음의 눈으로 타인의 속을 들여다 보고 그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내 것으로 만들어 거기에 나만의 레시피로 만들어 낸 다양한 양념으로 버무린 다음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나만의 글을 창출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렇게 남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끌어 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이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글을 쓰는 사람은 내 마음이 어떤 기류를 타고 움직이는지 스스로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글을 주로 쓰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요건이라고 본다. 자신 만의 주관이 너무 투철한 글은 그 글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감각이나 감성, 때로는 실용적인 요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쓴 글이 되기 쉽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글은 무용지물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우리가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글을 쓰는 이유나 목적은 모든 사람에 있어 다 다르겠지만 자기 혼자만 보는 일기마저도 때로는 혼자보기 아깝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유하고픈 것이 우리 인간이라면 글을 쓰는데도 '소통과 공유'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시사한다. 혼자 사색할 시간이 필요한 절대적으로 고독한 시간에도 작가의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이 고독한 사고의 물줄기가 큰 강을 만나면 합류한다. 우리의 고독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소통과 공유'란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