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서-
아버지는 그 후에도 일 년이 지나자 마자 “대학에서 1년 교육받았으니 이제 그만하면 됐다”라고 하셨고, 또다시 “이제 좋은 남자 만나서 살 자격이 충분하다”면서 학교를 그만두라고 하셨다. 이학년을 마치고 나니 “이제 전문대학은 마친 셈”이라며 결혼을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그놈의 결혼이 뭔지, 남이 보기엔 부녀 사이라기보다 견원지간이 따로 없었지만, 나는 이미 아버지와의 여러 번의 실전 경험으로 우리 부녀 간에 생긴 알력을 어느 정도 방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그런 와중에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4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결혼하라는 말씀도,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잠시 우리 집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보기에 아버지가 딸 셋, 아들 셋 육 남매의 맏이였던 나의 결혼에 대한 기대를 아주 내려놓으셨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제 조금만 참으면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시며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신 듯하다. 덕분에 나는 학사모를 쓰고 빛나는 졸업장을 타게 되었고, 아버지는 이제 딸이 대학공부를 마쳤으니 준수하고 집안 좋은 청년에게 시집보낼 꿈에 부풀어 계셨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직계 손인 내가 동성동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십여 년 전, 중앙선 완행열차에서 방학을 맞아 원주에 있는 집으로 가던 지금의 남편이 하도 사정해서 그에게 정말 별생각 없이 우리 집 주소를 알려준 게 화근(?)이었다. 우리는 그리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럴 때는 편지라도 주고받으며 몇 년간 오누이처럼 잘 지냈다.
적어도 그가 해병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면서, “처음 너를 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줄 알았다”며 무심한 듯 짧게 고백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와 나는 친구 이상의 사이는 아니었다.
아니, 그가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당시 내가 살던 부평의 한 외국계 전자회사에 입사한 후 그와의 만남이 보다 빈번해졌을 때까지도 나는, 지금 생각하면 알량하기 그지없는 내 이성의 힘을 철석같이 믿으며, 그와 친구로서의 만남을 계속 이어갔다.
돌이켜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 시기 그전보다 자주 그의 얼굴을 보게 되면서 철옹성 같았던 나의 이성의 힘은 그 누구도 눈치 못 챌 만큼 조금씩 뚫려 나가다가 어느 순간 급기야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나는 아버지와 같은 항렬의 이름을 가진, 아주 먼 옛날 우리의 친척일지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고 말았다.
당시 결혼은 했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제왕절개로 딸을 출산했을 때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거금의 수술비와 입원비를 병원에 바쳐야 했던 딸의 쓰라린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버지의 나에 대한 탄압은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종종, “이제는 용산에 있는 다산회관에서 열리는 종친회에 나가도 동성동본의 남자와 결혼한 오랑캐 같은 딸년 때문에 도저히 얼굴 들고 다니기도 민망하다”는 대못이 박힌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때는 더 이상 아버지의 그런 말씀에 대해 비관하거나 섭섭해하지 않았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이상, "어차피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인데" 라며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남의 일처럼 수수방관할 수 있는 묘한 능력을 이미 터득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무척 이율배반적인 생각이다. 나 외의 가장 가까운 타인은 부모님일 텐데, 그분들의 가슴을 그리도 찢어 놓았으니······. 그런데 성질 급한 세월은 그 걸음도 빠르다. 나도 아버지의 그 핍박이 다름 아닌 사랑의 이름이었던 것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깨닫고 이제는 오히려 그 핍박을 그리워하기에 이르렀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훗날 내가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인생길을 가다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때로는 남의 일 보듯 무심한 듯 방관할 수 있었던 나의 남다른 능력이 오히려 내 인생의 플러스로 작용한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럴 때 아버지도 “내 딸아, 그때 아버지의 말을 안 들어줘서 참 고맙구나!” 하실 게 틀림없다. 하늘에서 우리 가족이 알콩달콩 잘 살아가는 모습을 벌써 지켜보셨을 테니까······.
어쨌든 우리의 불법 결혼은 3년이 지난 후 동성동본혼 구제에 관한 한시법으로 적법혼이 되었고, 친척 중 두 분의 증인을 채택하여 재빨리 혼인신고를 했다. 그때는 마치 우리가 법의 관용으로부터 제외되기라도 할 것처럼, 실제로 시간이 넉넉했는데도 불구하고 ‘한시법’이라는 단어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 때문에 그리도 서둘러 그 일을 마쳤던 것 같다.
지금도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 주고 있는 한 남자, 우리 아버지의 핍박 대상 2호였고 한때는 귀신 잡는 해병대의 일원이기도 했던 나의 아재비뻘 되는 그 남자는 두 여자에게 잡혀서 너무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