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낮에 분당에 다녀왔다. A. K. 문화 센터에서 오랜만에 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처음에는 그곳의 모든 것이 생경해 앉아있기도 어색했지만,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연스레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일생과 그의 음악,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문학적 연관에 관한 강의였는데 제법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강연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베토벤의 괴팍한 성격에 대한 에피소드들이었다. 특히 그가 이사를 가는 도중에 자연의 매력에 심취하여 악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 자신도 모르게 타고 가던 마차에서 내려 그것들을 메모하다 이사 마차를 혼자 보내버리는 장면이 마치 내 눈앞에 영화 필름처럼 펼쳐졌을 때는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그 에피소드는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다는 것"은 "없는 것"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다름 아니라는 인생철학(?)을 가지고 있는 나였기에, 그렇게까지 그 자신의 일에 몰입할 수 있었던 베토벤의 탁월함이 위대해 보였고, 그런 그에게 나는 모종의 부러움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어떤 비교의식이 발동했다. 물론 나도 여러 가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몰입을 경험하면서 그것들로 인해 만족한 시간을 가져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내 일을 해 오는 과정에 있어서 이사 마차를 혼자 가게 만들 정도의 몰입의 경지까지는 가 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인에게 항산이 없으면 항심이 없다. 그러나 선비(군자)에게는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을 수 있다."라는 옛 말을 알고 있다. 이 대목에서 웬 항산, 항심? 그러나 들어보라. 빈곤한 데다 청각 장애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면서도 음악이라는 고상한 것에 유난하고도 지속적인 열정으로 주옥같은 곡들을 쏟아낼 수 있었던 베토벤이야 말로 어떤 면에서는 참으로 선비스러운 사람이 아닌가 싶어서다. 물론 그의 괴팍한 모습에서 일생동안 정의와 용기를 삶의 기본 모토로 여기고 살아왔던 동양적인 선비나 군자의 모습을 끌어내는 것에는 약간의 괴리가 있다. 하지만 빈한한 삶에 청력 장애까지 안고 살아야 했던 그가 항산이 없었을 때에도 항심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를 항심의 고수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고 싶었고, 그의 그런 용기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내게 없는 그 어떤 좋은 것이 누구에게는 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다. 그것이 지척에 있어 약간의 노력과 재능으로 잡을 수 있거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고 해서 못내 부러울 이유도, 의기소침할 이유는 더더구나 없다. 그렇지만 평생 염원하고, 일생 동안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해야만 하는가? 나는 소유할 수 없는 불굴의 정신을 베토벤은 가지고 있었다. 과연 나는 항산이 없을 시에도 그처럼 항심을 소유할 수 있는 인간 유형에 속할 수 있는 것일까?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그에 대한 나의 솔직한 대답은 십중팔구 “아니다”일 것이다. 남녀평등이니 여권신장이니 하는 말들이나 심지어는 현실은 그러하지 못할지라도 시대적으로 ‘여성상위’라는 표현까지 심심찮게 들으면서 살아온 나이지만 성장기에 부권의 압제에 종종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던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군자의 덕목’을 ‘여자의 덕목’과 일치시켜서 생각하지는 않는 묘한 아이러니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대답이 어렵잖게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면 우리 어머니 세대들의 여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 친구들이 나를 조선시대 여자라는 말 대신에 빅토리아 시대 여자라고 부르는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게 말한다고 뭐 좀 있어 보이나? 조선시대 여자나 빅토리아 시대 여자나 그 말들에 내포된 의미는 비슷하지 않을까? 아마도 서양의 여자들이 그래도 조선시대의 여자들 보다는 조금은 더 깨어 있었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나에게는 적어도 남자나 여자나 같은 사람인데 인간의 기본 도덕률에 대해 언급할 때 남녀를 구분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생각에 대한 갈등은 있다. 여자라도 기본 도덕률에 있어서는 소위 군자라고 칭함을 받는 사람들의 도덕률과 같은 수준의 것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여자니까 그보다 좀 편하게 살아도 된다는 두 생각 사이에서 종종 갈등하는 그런 구조의 생각인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힘들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 "다른 여자들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보다는 이럴 때 남자들이라면 어떻게 할까라고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거다. 예를 들자면, "여자의 박약한 의지나 변덕은 남자의 그것들보다는 덜 비난받을 타당한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 따위를 해 보는 것이다.
개인에게 도움이 되고 이 사회에도 득이 되는 일에 지속되는 마음을 가지고 매진해야 하는 것은 남녀 모두가 지켜 나가야 할 기준율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마음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한 남자가 그 분야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 나도 앞으로 무얼 하든 지 그 일을 통해서 그런 사람들의 항심을 배워 나가야겠다는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다짐을 해본다. 비록 그 일이 돈도 밥도 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이 이런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지라도, 나는 나의 갈 길을 간다. 어차피 인간은 이해되기 위해 창조되지 않았으니까. 아마 베토벤도 나처럼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와 나는 오늘 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