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몸을 빠져나간 깃털은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다니는 동안에는 그 가벼움으로 인해 잠시 자유롭다. 그러나 바람이 멎으면 그것이 아무리 가벼운 존재라 할지라도 곧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넓은 하늘을 거침없이 나는 새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 상징이지만 새의 몸으로부터 바닥에 떨어진 깃털은 더 이상 새의 일부가 아니다. 창공을 나를 수 있는 자유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천변의 흙길을 거닐다가 우연히 주워 든 재두루미의 깃털을 바라보는 오후의 상념이 지나치다. 날아가던 새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겨우 깃털 하나일 뿐이지만 이것이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말미를 제공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유라는 말을 떠올리면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정말 이런 연관이나 연상은 이제 별로 달갑지 않다. 왜 나는 자유에 대한 주제를 떠올릴 때마다 그것의 정의에 반(反)하는 도피라는 달갑지 않은 단어와 이렇게 마주쳐야 하는가? 왜 인간은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면서 도피할 줄 모르는 바람의 본성을 외면하는가? 이제는 이러한 자유에 대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인간의 뇌는 항상 무언가로 차 있어서 어떤 생각을 하려 할 때 시작의 단계를 생략하고 중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이미 형성되어 우리 머릿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고정관념의 힘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이 생략의 단계를 생략하지 않고 생각해 보는 태도를 길러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 그런 과정에서 나의 어떤 생각들이 이미 형성된 고정관념과 늘 부딪히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한번 더 걸러질 수 있는 단계를 거치므로 좀 더 유연해지고 정제된 형태로 재입력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 니체도 반대(objection), 탈선(side slip), 명쾌한 불신(light-hearted mistrust), 조롱하는 즐거움(pleasure in mockery) 등을 오히려 건강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무엇이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순한 행위가 될지는 모르지만 미덕은 아니며 더구나 건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또한 니체는 무조건적인 것을 병리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나도 그가 제시한 건강의 신호들이 우리가 굳건하게 보유하고 있는 고정관념들의 거름망이 되어 줄 것을 확신한다. 또한 인간이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현상 안에 혹 내재되어 있을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들을 잘 걸러내어 유용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본다.
자유, 곁에 있어도 늘 그리운 말이다. 너무 많이 누리게 하면 인간을 방종의 늪으로 빠지게 하고 지나치게 제한하면 그로 인해 억압된 심리상태에 놓이게 만든다. 그 결과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의 근원이 되어 이 사회의 커다란 불안의 요소로 작용한다. 자유를 논할 때 누가 어떤 자유를 누리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해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더욱 필요하다. 두 사람 이상이 존재하는 곳이면 이 지구상 어느 곳이라도 이런 문제를 회피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한다.
그런데 자유의 균형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약자의 자유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고 지나갈 수가 없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두 사람의 구성원만 존재하는 곳이라 해도 차칫하면 그곳에서 한 사람은 약자가 될 수 있다. 약자의 자유가 배제된 자유는 상대적일 뿐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살면서 한 번쯤은 겪어보아 알 것이다. 문제는 어떤 집단이나 단체에서 약자가 되는 과정이 때로는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어가듯이 서서히 쥐도 새도 모르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누구보다 행복해야 할 신혼 초부터 주도권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다들 어디에서 "여자는(남자)는 무조건 신혼 초에 잡지 않으면 평생을 잡혀서 살아야 해"라는 충고를 너무 명심해서 들었는지 쓸데없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각을 세운다든가 별 명분도 없이 은근슬쩍 우위에 군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자들이 그들이다. 이 전쟁 아닌 전쟁은 특히 부모 슬하에서 자랄 때 많은 압박을 경험한 커플들이 만나면 최악이 된다. 마치 자신들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받고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어떨 때는 저녁 메뉴를 뭘로 할까 와 같은 사소하기 그지없는 문제를 가지고도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이런 신혼의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하여 상대방보다 우위에 선다고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더 많이 보장되는 건가? 과연 싸움에서 져서 약자가 되어버린 상대를 누르고 얻은 여분의 자유가 나를 얼마나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부모로부터 자유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분리되면 무한한 자유가 보장될 줄 착각을 한다. 아무리 보장된 자유라 할지라도 자유는 누릴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그 자유가 무용지물 일 뿐이다. 그들은 그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이다. 언제든지 창공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으려면 자신의 일에 책임을 다 할 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정신적 각성이 부족한 자유는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획득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일시적인 도피라는 정해진 궤도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소극적인 복종이나 관습 혹은 강요된 순종에 의한 도피는 이제 그만두고 적극적인 자아성찰의 힘으로 얻은 진정한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 인간 본연의 독자성과 개성에 근저를 둔 적극적인 자유의 실현 "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전개인적(前個人的)인 기반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꿈꾸어 보아야 한다. 개인 본연의 자유를 어떤 강한 자나 그 무리들에게 위탁한 대가에서 파생하는 안전한 삶에 익숙해진 인생에서 가능하다면 벗어나야 한다. 현실적으로 이러한 생각의 실현이 쉽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생각만은 늘 도피를 모르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수는 없을까. 적어도 우리 모두 이런 문제에 관해 먼저 치열하게 고민해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