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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May 01. 2023

투자의 본질: 질투와 배아픔 <2021.11>







폴 귀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e, 1832~1883) 作 Cain and Abel Offering their Sacrifices



죄가 된 이름, 카인(Kayin). 

그가 동생 아벨(Abel)에게 품은 마음은 인간의 원형을 보여줬다. 제사를 지내던 날이었다. 농부인 카인은 빵과 채소와 과일을, 목자인 아벨은 새끼 양을 제물로 준비했다. 번개는 아벨이 준비한 새끼 양에게 떨어졌다. 까만 연기는 하늘로 올라갔다. 하느님이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았다는 의미였다. 한편, 카인이 준비한 제물에는 번개가 떨어지지 않았다. 번개와 가까이 있어서 카인의 얼굴이 검게 그을렸을 뿐이었다.     




“보아라, 하느님께서는 불공평하시다!”

검은 얼굴이 된 카인이 아벨에게 말했다. 믿음에 금이 간 것이다. 땀을 흘려서 준비한 곡식이 받아들여질 거란 믿음에, 선(善)은 결국 보답을 받을 거라는 믿음에, 하느님께서는 공평하시다는 믿음에. 비극의 전조였다.         


  

폴 귀스타브 도레(Paul Gustave Dore, 1832~1883) 作 Cain Slays Abel



뭐, 알다시피 아벨은 살해당했다. 

카인이 돌로 그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아벨의 양이 카인의 밭으로 들어가서 곡식을 망가뜨렸기 때문에. 그 사건이 안 그래도 질투로 가득 찬 카인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

카인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자식이요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와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질투는 내가 하는 이 게임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11월 초, 하락이 계속됐다.

팽창했던 잔고는 쪼그라들어 가벼워졌다. ‘메타버스’ 라는 소재가 힘을 잃었고 달러가 강해져 비트코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에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진 코인을 손에서 ‘털고 나가는 길’, 아니면 꽉 붙잡고 ‘버티는 길’.       



   

끝이라고 생각했다. 

올라도 너무 올랐으니까. ‘메타버스’라는 이벤트가 소멸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가격은 더 깊이 내려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 시간마다 수백만 원이 빠지는 걸 보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몇십만 원도 나에게 큰돈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단 변동폭이 작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으로 갈아타서 시장을 관망하고, 천천히 돈을 빼서 투자를 마무리하는 게 나에게 맞는 길이라 생각했다.          




결국 모든 걸 팔았다.

모든 코인을 현금으로 바꿨고 다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샀다. 잘 벌었다는 느낌, 잘 팔았다는 느낌, 그리고 잘 샀다는 느낌에 흡족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느님이 나에게 승자의 역할을 맡긴 줄 알았지 낙오자의 역할을 맡긴 줄은 몰랐다.          



다시 오른 샌드박스(SAND) (출처:업비트)




썅, 엇박자가 나고 말았다.

내가 팔고 나가자 가격이 다시 올라간 것이다. 얼마나 드라틱한 스릴러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그 코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코인들이 나를 버린 것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걸 보며 쌍욕이 절로 나왔다. 미국 코인 커뮤니티에선 메타버스 코인을 ‘신’이라고 떠들어댔다. 썅. 부활을 했다고? 믿기 싫었다. 그렇다고 팔았던 걸 다시 산다? 그럴 용기도 없었다. 나는 어, 어 하고 소리만 지를 뿐 꼼짝도 못했다. 비행기를 놓친 공항의 낙오자처럼 가만히 앉아서 자기혐오를 끙끙 앓을 뿐이었다.         



  

이 게임에서 질투는 묘하다.

피해 망상이 일어난다. 내 손을 떠난 종목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역겹고 그들이 웃는 걸 보면 내장이 뒤틀린다. 내가 질투를 느끼는 대상은 사실 나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아벨이 카인이 받을 사랑을 빼앗으려고 한 적이 없었듯이. 하지만 나는 마치 다른 사람들이 의도를 가지고 ‘나의 행운’을 빼앗았다고 느꼈다.      




죄가 된 이름, 카인(Kayin).

카인과 아벨의 어머니 하와(Eve)는 오래전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한다. 꿈에서 아벨이 다쳐 피를 흘리고 있는데 카인이 동생을 구하기는커녕 몸을 굽혀 아벨의 상처를 핥고 있었다고. 한편, 사도 요한(St John the Apostle)과 같은 성인들은 이런 식으로 경고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 카인을 닮아가지 말라”라고. 맞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나보다 더 버는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쿵 하고 떨어지길 바랐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망가지길 바라는 심보로. 다른 사람들의 피를 봐야겠다는 심보로.   



        

나는 이제 안다. 

질투는 이 종목의 본질이다. 아닌 척해도 뇌의 외딴곳에서는 질투가 궤양의 뿌리처럼 퍼진다. 질투는 배를 쑤시게 하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그래서 이 게임에서 서로 사랑하는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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