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바스와 크름반도에 무관심하지 마십시오.”
2021년 9월,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말했다. 그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우크라이나에 무관심하지 마십시오.” 같은 날 ‘미국-우크라이나의 전략적 파트너십에 대한 공동 성명(Joint Statement on the US-Ukraine Strategic Partnership)’이 발표됐다. 내용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제공하고 그들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함께 군사훈련을 하고, 민주주의와 정의와 인권 증진에서 큰 역할을 맡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의 보장은 지금 어디로 갔습니까? ”
푸틴은 2007년부터 나토에 비난과 경고를 해왔다. 러시아는 뒤통수를 맞았고, 러시아의 신경을 긁어대는 나토의 동진, 특히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는 건 명백한 레드라인 위반이라고. 마치 미국이 1962년에 쿠바 미사일에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러시아는 나토를 점점 퍼지는 종양처럼 생각했고, 우크라이나를 양보할 수 없는 안보적 가치로 여겼다.
2021년 말, 흉흉한 기운은 거세졌다.
러시아는 나토에게 약속을 지키라며, 나토는 러시아에게 그런 약속한 적 없다며 서로 으르렁거렸다. 한편,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훈련을 했고, 푸틴의 의도를 맥박처럼 감지한 미국은 러시아가 곧 우크라이나를 때릴 거라고 온 세계, 온 동네에 떠벌리기 시작했다.
재채기가 나오기 직전의 적막 같았다.
무언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서 세계 최고 겁쟁이인 주식 시장은 불안과 안심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협상을 할 거라는 뉴스에 시장은 긴장을 풀었다가, 러시아가 정말로 우크라이나를 공격할 거란 뉴스에는 다시 긴장을 조였다.
전쟁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국은 위험한 신호를 감지했지만, 많은 정치인과 전문가들은 전쟁이 쉽게 날 리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합리적일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의회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유럽 땅에 탱크 전이라니, 다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의 군사훈련을 병정놀이로 치부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에 노크를 하면서 메시지를 주고받고 끝나거나, 설사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협상으로 빠르게 마무리될 거라 믿었다. 뭐, 결국 틀렸지만.
현실은 끔찍한 방향으로 미끄러졌다.
모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측은 허무해졌다. 외교와 정치로 밥을 먹고 사는 학자들과 외교 전문가들은 바보 꼴이 됐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처럼, 베를린 장벽의 붕괴처럼, 소련의 사망 선고처럼, 일본 부동산의 붕괴처럼, 9.11 테러처럼, 트럼프의 당선처럼 역시나 역사는 합리적인 예측을 엿 먹이고 희롱하며 불확실한 길로 미끄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