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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 올드스 Olds Feb 19. 2023

'사랑해'와 인플레이션 <2021.8>









‘경제 성장이 우선’ 

그때 제롬 파월의 말은 나를 추억에 빠지게 한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낡을 것 같아.” 그때 나는 어두운 방의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통화를 했었다.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던 새벽이었다.         



 

11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둘 사이를 이끌었던 ‘좋아해’는 ‘사랑해’에게 밀려났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등장하자 ‘좋아해’는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대화 밖으로 쓸쓸히 쫓겨났다. 정권이 끝나고 귀양을 가는 정치인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 뒷모습이었다.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모습



그때 나는 걱정에 빠졌다.

예전에 본 경제 교과서와 인터넷 기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경제 교과서에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지폐를 연료로 사용하는 독일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인터넷 기사에는 베네수엘라 시장에서 지폐로 만든 가방을 파는 상인의 모습이 있었다. 두 사진 모두 지폐의 가치가 제대로 망가졌다는 걸 보여주는 삽화였다.      



      

그래서 걱정에 빠졌다.

그 지폐들처럼, 언어도 밖으로 넘쳐흐르면 가치를 잃지 않을까라는 그럴듯한 걱정. 하루에 수십 번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는 명품처럼 하루에 한 번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보다 강도가 약하다는 걱정. 그래서 ‘사랑해’의 의미가 변질되고 가벼운 말이 될 것이라는 걱정. 다시 말해 진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해’ 수십 번을 말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했던 거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그날 새벽에 나는 ‘사랑해’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자고 말했다. 일종의 긴축 정책. 꼴값이었다. 하지만 그땐 진지했다. 그러자 그녀의 반응은? 정적. 그리고 곧 내 귀에 들린 말 “아끼면 똥 돼.”          



      

협상 결렬. 

나는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봤다. 거기서 답이 나올 것처럼. 하지만 내 방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내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랑은 갑자기 끝날 수 있으니 사랑이 무한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 말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나와 전제부터 달랐다. 

‘사랑’이 지폐 발행 기계고 ‘사랑해’가 화폐라고 비유한다면, 나는 사랑이 오래가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이 갑자기 고장 날 수 있는 기계라고 생각한 거였다.     



          

나는 그녀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고집으로 버텼다. ‘사랑해’가 가벼운 말이 되면, 진심을 표현할 때 ‘사랑해’를 열 번을 말해야 한다고, 아끼면 똥 되지만 계속 말해도 똥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녀가 받아쳤다. 

“알겠어, 그런데 만약 내일 내가 사고로 죽으면?, 사랑이 커지기 전에 끝나버리면?” 그리고 정적. 그 말을 듣고 놀란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갑자기 ‘사랑해’를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아껴뒀던 단어를 풀 수밖에 없었다.           



‘경제 성장이 우선’ 

그때 제롬 파월의 말은 나를 추억에 빠지게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성장 없는 긴축은 위험하다는 걸 이미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경제학과였나? 헷갈린다. 뭐, 어차피 다 옛날이야기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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