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와 인플레이션 <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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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이 우선’

그때 제롬 파월의 말 때문에 추억에 빠졌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사랑해’를 남발하면 나중에 의미가 낡을 것 같아.” 나는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며 통화를 했었다. 책상 위 스탠드 하나만 조용히 빛나고 있던 새벽이었다.




11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둘 사이를 이끌었던 ‘좋아해’는 ‘사랑해’에게 밀려났다. ‘사랑해’는 강했다. ‘사랑해’가 한 번 등장하자 ‘좋아해’는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좋아해’는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대화 밖으로 쓸쓸히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뒷모습이었다. 11월, 나와 그녀는 ‘사랑해’라는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제목을-입력해주세요_-_-복사본-029.png 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의 모습



그때 나는 걱정에 빠졌다.

예전에 본 경제 교과서와 인터넷 기사가 생각났다. 경제 교과서에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지폐를 연료로 사용하는 독일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인터넷 기사에는 베네수엘라 시장에서 지폐로 만든 가방을 파는 상인의 모습이 있었다. 두 사진 모두 지폐의 가치가 제대로 망가졌다는 걸 보여주는 삽화였다. 걱정됐다. 그 지폐들처럼, 언어도 밖으로 넘쳐흐르면 가치를 잃지 않을까라는 그럴듯한 걱정. 하루에 수십 번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는 명품처럼 하루에 한 번 입에서 나오는 ‘사랑해’보다 강도가 약하다는 걱정. 그래서 ‘사랑해’의 의미가 변질되고 가벼운 말이 될 것이라는 걱정. 다시 말해 진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해’ 수십 번을 말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했다.


그래서 협상응 시작했다.

그래서 ‘사랑해’는 일주일에 한 번만 하자고 말했다.

일종의 긴축 정책. 꼴값이었다. 그녀의 반응은? 정적. 그리고 내 귀에 들린 말 “아끼면 똥 돼.”


협상 결렬.

나는 아무 말 없이 천장을 봤다. 거기서 답이 나올 것처럼. 하지만 내 방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내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사랑은 갑자기 끝날 수 있으니 사랑이 무한하지 않을 것임을 명심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 말이 필요하다고.



나와 전제부터 달랐다.

‘사랑’이 지폐 발행 기계고 ‘사랑해’가 화폐라고 비유한다면, 나는 사랑이 오래가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이 갑자기 고장 날 수 있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생각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고집으로 버텼다. ‘사랑해’가 가벼운 말이 되면, 진심을 표현할 때 ‘사랑해’를 열 번을 말해야 한다고, 아끼면 똥 되지만 계속 말해도 똥 되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녀가 받아쳤다. “알겠어, 그런데 만약 내일 내가 사고로 죽으면?, 사랑이 커지기 전에 끝나버리면?” 그리고 정적. 그 말을 듣고 놀란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갑자기 ‘사랑해’를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아껴뒀던 단어를 풀 수밖에 없었다.



‘성장이 우선’

그때 제롬 파월의 말은 나를 추억에 빠지게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성장 없는 긴축은 위험하다는 걸 이미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경제학과였나? 헷갈린다. 뭐, 어차피 다 옛날이야기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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