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가 맛있어지는 순간

군대는 글 감옥이지 말입니다.

by 청년홈즈

“막내야”

“이병 전병호”

“뭐 그리 길게 싸냐? 끊고 빨리 나와”

“네 끊고 나가겠습니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빠지지 않는 얘기가 군대 얘기다. ‘나는 공수 부대 나왔네’ ‘나는 유격을 몇 번을 뛰었네’ ‘수색대에서 죽을 뻔했네’ 하며 자신의 군 경험을 뽐낸다. 힘든 군대생활을 잘 견뎌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군대란 어느 부대 출신이 더 고생스럽고 더 멋진 군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군복 입은 자체가 힘든 것이니 공수부대 출신이나 6개월 방위 출신이나 힘든 것은 비슷했을 게다. 생각해 보라. 한 참 팔팔한 나이에 제 맘대로 못하는 것만큼 세상에 힘든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고로 방위 출신이나 공익 출신이라도 남들처럼 똑같이 고생했으니 이제부터 어깨 펴고 가슴 펴고 더 당당해지시라.


1989년 11월, 강원도 화천 백암산 자락의 겨울은 엄청 급하게 찾아왔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굴렀던 신병교육대 생활이 엊그제 같은데 철책의 산자락은 이미 한겨울이었다. 북풍한설이 내리치는 철책, 막내 이등병의 하루는 고되고 고됐다. 나는 약간 활자중독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도 여전히 술 마시는 것 다음으로 좋아하는 일이 책 읽는 일이다. 군대 시절도 그랬었다. 하지만 이등병 막내에게 책이란 사치품에 불과했다. 육체적 고통이야 견디면 그만이었지만 국방일보 쪼가리조차 읽을 자유시간이 없다는 것은 고문 중의 왕고 문이었다.


어느 날 후배가 동아리 소식지를 보내왔다. 받는 순간 깜깜했던 군생활이 갑자기 환해졌다. 군대에서 받아 보는 편지 한 통은 사회에서 주는 기쁨보다 십만 배쯤 더 큰 기쁨을 준다. 경험해 본 사람은 다 안다. 혹시 지금 지인 중에 누가 군대에 있다면 당장 편지 한 통 써보길 권한다. 그에게 희망의 빛을 선사하는 엄청난 보시가 될 것이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 막내는 소식지를 품에 숨기고 막사 옆 푸세식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최고의 휴게실이자 나만의 공간인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글 맛을 막 보려는데 밖에서 호출 소리가 들린다. ”막내야” 주섬주섬 뒷수습을 하고 동아리 소식지는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관물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 해 겨울을 날 동안 몇 페이지 안 되는 그 동아리 소식지는 관물대를 들락이며 끝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막내는 소식지를 소각장에서 태워 버렸다. 소식지 하나 읽겠다며 안절부절 숨바꼭질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국방일보.jpg 군대 있는데 군대 얘기 천지인 국방일보, 활자 고픔에 빠지면 이런 국방일보도 맛있다.


글자 고픔을 아시는가?

겪어 본 사람은 안다. 오랫동안 글을 읽지 못하면 눈앞에 환영으로 글들이 막 돌아다닌다. 뭐든 읽어 보고픈 욕망으로 허기를 느낀다. 글자 고픔에 빠지면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내용 없는 국방일보 쪼가리 글조차 감동의 명문으로 읽흰다. 그 짧은 나만의 자유의 시간, 변기 아래로 시원하게 내지르면서 눈으로 들어오는 글자의 맛이란…… ‘평화란 이런 것이다’라는 진리를 저절로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평화가 5분을 넘기 지 못하는 곳이 바로 군대다.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글자 맛을 음미하며 막 씹으려 할 때 ‘막내야’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난 깨달았다. 폭력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폭력은 자기 의지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폭력임을.


이리 써 놓고 보니 회사 가기 싫은 마음이 날 째려본다. 한량이 체질인 내가 조직에 묶여 살아가야 하다니…… 내 의지대로라면 하루 종일 뒹기적거리며 책을 벗 삼아 낮술이 제격인데.


‘아~ 이 세상은 정녕 내 의지대로 먹고살 수 없는 곳이란 말인가?’


※AS: 30년 전 군대 얘기다. 지금은 안 그럴 것으로 철석같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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