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봉제공장 소녀의 꿈

미얀마의 관문 양곤의 얼굴, 세 번째-미얀마 봉제공장 소녀들

by 청년홈즈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싱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 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 박노해 '시다의 꿈' 중에서

'시다(しだ)'는 보조원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이 단어를 듣는 동시에 '봉제공장' '재봉틀' '쪽방촌'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중년 이상이다. 이런 말들에 따라오는 단어는 '구로공단' '가리봉동' '봉천동' 같은 말들일 게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 '가산디지털단지' 같이 첨단산업단지 이미지로 변했지만 30~40년 전, 이곳 구로동 지역은 가난한 시골소녀들의 '시다의 꿈'이 몽글몽글 맺혀 있던 곳이다. 지금이야 기억 속에 가물가물 잊혀가지만 불과 한 세대 전 이 땅의 수많은 누나들은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채 도시로 팔려가 '시다의 꿈'에 청춘을 바쳐야 했다.

시다3.jpg ▲ 시다의 꿈:하루 종일 앉지도 못한 채 미싱 보조 일을 하면서 받는 일당 속에 가족의 희망이 달려 있다.


미얀마 봉제공장 소녀들에게 '시다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먼 나라 미얀마에서 우리 누나들의 '시다의 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제 막 산업화의 기지개를 켜고 있는 미얀마의 최대 도시 양곤의 많은 공장에서는 우리 누이들이 30~40년 전 그랬던 것처럼 많은 미얀마 누이들이 '시다의 꿈'을 꾸고 있다.

미얀마는 한 때 우리나라보다 더 부유한 나라였다. 하지만 기나긴 군부통치는 모든 것을 거꾸로 돌려놓았다. 성장동력을 잃은 채 국제사회 속 존재감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시다1.jpg ▲미얀마 소녀 일당 노동자들: 2014년 냥쉐(Nyaungshwe)에서 만난 소녀 일꾼들, 일당 3,500짯을 받는다고 했다. 2019년도 소녀들의 일당은 그리 오르지 않았다. 하


2019년 11월 기준 미얀마 평균임금은 110달러(US달러) 수준이라고 한다. 자료 취합 자체가 어려워 어떤 통계든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110달러 수준이면 같은 동남아 국가 중에도 훨씬 저렴한 것은 사실이다. 2019년 기준 미얀마 최저임금은 일 4,800짯(3.55us$=한화 3,740원) 수준이다. 시간당 600짯이니 우리 돈으로 시급 470원(2019년 11월 환율 기준 1,000짯원)인 셈이다. 미얀마에서 막노동하는 사람의 일당이 4,500~6,400짯(한화 약 3,500원~5,000원)으로 하루 1만 원이 안 되는 셈이니 임금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2021년 우리나라 최저임금 기준은 시간당 8,720원이다.

이런 이유로 쿠데타 이전 중국이나 베트남 등에 공장을 짓던 각국 기업들은 인건비 상승과 과열경쟁을 피해서 하나 둘 미얀마로 터를 옮기기 시작했다. 불안한 정세, 낙후된 산업 인프라, 열악한 전기 사정 등 위험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기회에 투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어느 정도 정국이 수습되면 분명 몇 년 안에 미얀마의 경제성장은 가속도를 내리라 확신한다.


시다2.jpg ▲ 양곤 근교 이랜드 제우(Jewoo) 공장: 거대한 공장 속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보면서 개발성장시대 우리 모습이 보였다.


시다.jpg ▲ 봉제공장 소녀의 꿈: 저 소녀들의 손에 가족의 희망이 달려 있다


지금 미얀마에는 30~40년 전의 우리가 있다.

이랜드의 미얀마 현지법인이 운영하는 제우(Jewoo) 봉제 공장도 그중 하나다. 첫 번째 여행 시 우리는 그곳을 방문했었다. 양곤 근교에 있는 이랜드 제우는 원래 다른 한국 사람이 운영하던 봉제 공장을 이랜드가 인수한 공장이라 한다. 이 봉제공장에서는 이랜드 브랜드 이외에도 SPAO, 티니위니, 미쏘 등의 제품을 생산하는데, 반문 당시 한국인 몇 명과 2천여 명이 넘는 미얀마 직원들이 일하는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처음 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좀 잔인한 표현이지만 나도 모르게 양계장이 떠올랐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그 위로 예전 우리 누나들 얼굴이 스쳐갔다. 미싱사 옆에 실밥을 따주고 이것저것 잔심부름하는 보조원(시다) 속에 30~40년 전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시다는 참 서럽고 힘든 보직이다. 나는 20대 시절 잠깐이지만 시다 생활을 했었다. 미얀마의 어린 시다의 모습을 보니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들락거렸다. '지금 저 어린 소녀의 손에 한 가정의 생계가 달려 있고, 저 가녀린 시다의 손에 동생의 학비가 달려 있고, 저 재단사 손에는 한 집안의 생계가 주렁주렁 달려 있을 것이다.'

공장을 도는 동안 밀려오는 답답함에 다 돌아보지 못하고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미얀마의 하늘은 무심하게 여전히 푸르고 햇볕은 화살처럼 강렬했다. 마음을 풀고자 도망쳐 나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또 하나의 광경에 다시 감정이 요동쳤다. 공장 한 편에 개방된 직원용 식당이 있었다. 식당 의자마다 수백 개의 도시락이 울긋불긋 수놓은 것처럼 놓여 있었다. 직원식당인데 배식을 하고 식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 도시락을 먹는 장소였다. 아직 기숙사 시설이나 식사 제공 직원 복지가 없는 여건이라 직원들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울긋불긋 쌓여 있는 도시락을 보니 예전 어머니가 싸주던 도시락이 떠올랐다.

시다4.jpg ▲ 도시락 꽃밭:미얀마 봉제공장 직원들의 도시락, 주인을 기다리는 수백 개의 도시락이 색다른 모습이었다.


고마운 우리 시대 '누이들'에게

미얀마 봉제공장 소녀들을 보며 우리나라 누이들을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 발전의 토대로 독재와 싸워온 청년들, 열사의 나라에 파견되었던 건설 일꾼, 독일 탄광으로 파견되었던 광부들 등을 많이 거론한다. 그동안 우리는 이 땅 누나들의 노력에 대해서 시대적으로 저 평가되었다는 생각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대한민국 성장의 저변에는 바로 우리 누나들 '시다의 꿈'이 있었다. 더 들어가 보면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들을 위해 양보해야 했고, 대학 간 오빠를 위해 공장에 가 학비를 벌어야 했던 누나들이 있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자기희생으로 집안의 가난을 온몸으로 막아준 대한민국 누나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의 마음을 전해야 한다.


시다5.jpg ▲미얀마 이랜드 제우(Jewoo) 공장:미얀마 봉제공장 소녀들 속에 우리의 과거가 깨알같이 박혀 있었다.


지금이야 다들 명절은 스트레스라지만 예전 명절은 기다림과 설렘이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서울로 보낸 딸을 기다리는 부모들의 목은 더욱 길어졌다. 그 옆에 꼬마들도 덩달아 동네 어귀를 지키느라 목이 길어졌다. 명절과 함께 서울 간 누이들의 소식도 함께 왔다.
"답박골 옥자는 돈 벌어 지 아부지 송아지 한 마리 사줬다네 참 효녀지. 암."
"웃골 미자는 지 엄마 금가락지 한 쌍을 해줬다는구먼."
지금은 어디서 어머니, 할머니로 살고 있을 옥자 누나, 미자 누나가 보고 싶어 지는 밤이다.

그 누나들의 '시다의 꿈'이 이루어졌기를...

※ 2016년 기나긴 군부통치를 끝내고 아웅 산 수치가 이끄는 민주국민동맹이 총선 승리를 통해 민선정부를 표방하며 정권을 잡았으나 2021년 2월 다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미얀마에 평화가 하루빨리 돌아오길 기도한다.


덧붙이는 글 | 미얀마 가서 ‘노가다’나 뛸까?

미얀마 여행기를 쓴다고 하니 친구 중에 하나가 그런다.
"이제는 담배도 제대로 못 피겠고 직장인을 봉으로 아는 이 놈의 나라 떠나든지 해야지 원."
"야 미얀마 가서 ‘노가다’라도 뛰면서 살면 마음이라도 편할 거 같다. 미얀마 같이 갈래?"
지금 쓰는 여행기는 여행자로 느낀 감정을 쓴 것이다. 그곳에서 사는 것은 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기회의 땅임은 틀림없으나 일단 저런 도피성 마음을 먹은 사람이 있다면 미얀마행은 말리고 싶다. 여행자로 방문은 추천하지만 다른 이유로 미얀마행은 신중하길….
그래도 꼭 가겠다면 이것만은 꼭 알고 가자. 미얀마에서 하루 종일 막노동해서 받은 돈(2019년 기준 일당이 4,500~6,400짯=한화 약 3500원~5000원)으로 소주 한잔 못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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