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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Feb 22. 2019

수호천사 울 엄니

엄니의 손편지

 “엄마~ 얏”

놀랐을 때 “엄마”라는 단발마가 왜 튀어나오는지 나는 그 이유를 군대에서 확실하게 알았다. 아버지가 이름만으로도 대장 같은 존재였다면, 엄마는 이리저리 채여 하루하루 견뎌 내야 하는 졸병의 든든한 수호천사였다.

 

1931년생 울 엄니는 일제시대 태어나 잠시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어렸을 때 나는 울 엄니가 글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울 엄니 친필을 본 것은 내가 강원도 화천에서 뺑뺑이 치던 이등병 때였다.


“전이병! 니 편지 왔는데 글씨가 왜 이 모양이노? 초등학생 사귀나?”

훈련을 마치고 복귀한 저녁, 글찮아도 얄미운 선임은 실실 웃으며 비꼬듯 편지 한 통을 던졌다. ‘이주영’ 분명 엄마 이름이었다. 점호 준비를 해야 했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점호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취침 전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가 희미한 30촉짜리 불빛 아래 편지를 뜯었다.

 

‘사랑하는 아들 병호 보아라’로 시작한 편지는 삐뚤빼 글씨로 편지지 한 장을 채우고 있었다. 글씨를 보는 순간부터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푸세식 변기의 똥 냄새가 올라오는 것도 잊고 꺼이꺼이 울었다. 삐뚤빼뚤 글자마다 뛰어나오는 엄니 때문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소중한 울 엄니의 그 처음이자 마지막인 편지는  군복 상의 왼쪽 주머니에 자리를 잡고 힘겨운 졸병 시절 내내 나의 수호천사가 되었다. 선임에게 아무 이유 없이 한 딱까리 당한 날이면 화장실로 달려가 엄니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 즉시 상처는 아물고 나는 또다시 씩씩한 병사가 되었다.


수호천사 엄니 편지가 나를 살린 일이 있었다. 강원도 화천 백암산 자락 철책근무 시절, 나를 유난히 못살게 굴던 선임이 있었다. 이 얄밉고 못된 선임이 나와 근무조 일 때, 누나와 여동생을 들먹이며 성적 농담을 했다. 갑자기 피가 거꾸로 쏟고 그 자를 죽이고 싶었다. 실탄이  장전된 소총  방아쇠에 손이 갔다. (지네딘 지단이 왜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경기에 상대 선수 머리를 박았는지 이해한다) 그때 나를 살린 것이 바로 왼쪽 가슴에 엄니 편지였다. '만약 그때 방아쇠를 당겼더라면'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내 생명을 살린  수호천사 엄니 편지는 그렇게 상병 때까지 나를 든든하게 지켜줬다.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위험한 게 급똥이다. 나는 선천성 ‘과민성 대장 증상’이 있다. 갑자기 변화된 환경이나 극심한 스트레스가 오면 아랫배가 아파오고 배가 꿀렁거린다. 어느 늦가을 야종(야외 종합훈련)을 뛰던 때였다. 행군을 하던 중 갑자기 아랫배에 신호가 왔다. 복식호흡을 하며 견뎠다. 한계에 다다를 무렵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10분간 휴식, 담배 일발 장전!’

후다닥 숲 속으로 뛰었다. 바지를 내리자마자 굉음과 함께 진한 향기가 올라왔다.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이런 뒤처리를 어쩌지?'

초겨울 숲 속은 삭막했다. 주변에는 바스러진 가랑잎 몇 장이 전부였다. 저만치 병사들이 행군 준비하는 게 보였다.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왼쪽 가슴속 내 수호천사가 생각났다. 하도 읽어서 조각조각 난 ‘사랑하는 아들 병호 보아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대충 읽고 뒷일을 해결했다. 그렇게 내 졸병 시절을 지켜준 수호천사는 떠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양말이라도 벗을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허나 뭐 괜찮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저장 되어 있으니.  

엄니! 영원한 나의 수호천사여!


※수호천사 울엄니는 10여 년 병상생활을 마감하고 지난해 하늘나라에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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