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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Oct 24. 2023

한국인의 에너지원 한과 한풀이

K-문화 유전자의 비밀

새는 왜 매일 우는 것인가?

새는 억울하다. 직접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한국인들은 새가 늘 울고 있다고 말한다. 싱그러운 봄날 짝을 부르는 꾀꼬리 소리는 분명 우는 소리는 아니다. 누가 사랑을 찾으며 울겠는가? 노래를 하거나 웃겠지.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문밖 새들이 소란스럽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는 소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날도 밝지 않은 새벽부터 매일 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상중이라면 몰라도.


어찌하여 한국인은 새가 늘 우는 것이라고 생각할까? 왜 한국인 귀에는 새소리가 울음소리로 들리는 걸까? 새에게 한국인들의 마음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리라. 가슴 한편에 한 한 자락쯤 묻고 사는 한국인들의 감정이 이입되었기 때문이리라. 맘 것 울고 싶은 마음으로 들으니 소쩍새도 울고, 뻐꾸기도 울고, 소도 울고, 매미도 울고, 귀뚜라미도 울고, 한국인들 귀에는 세상 만물이 다 우는 소리로 들린다. 

꾀꼬리: 꾀꼬리는 우는 걸까? 웃는 걸까? 노래하는 걸까?

한은 한국인의 정서를 대표하는 고유한 정서 중 하나다. 소설가 황석영 선생은 한의 개념이 일제강점기 일본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가 최초로 언급한 말로 원래 우리 문화에 없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여러 기록이나 민담, 설화 등을 종합해 보아도 한은 우리 고유의 정서임이 확실하다. 원래 없던 한이 일제강점기에 나온 개념이라면 한을 품고 죽은 그 많은 귀신들은 어찌 설명해야 하며 한풀이 문화는 어떻게 볼 것인가? 

다만 일제강점기 야나기 무네요시와 같은 일부 친일 지식인들에 의해 한의 부정적인 면이 더 확대 증폭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을 ‘비애미’로 풀이하며 당시 일부 지식인들의 어둡고 퇴영적인 면과 연결하여 설명하였다. 한의 부정적인 정서를 더 강조함으로써 망한 조선을 폄하하는데 인용했던 것이다. 


한은 부정적이고 무기력한 개념의 정서가 아니다. 강증산이 말했던 ‘한을 풀고 함께 잘 살자’는 해원상생(解冤相生)의 정서가 바로 한국인의 한에 대한 한풀이 정서다. 한을 풀어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로잡아 한풀이 신명으로 전이되는 상생의 정서다.


아랑은 밀양부사의 딸로 그녀를 겁탈하려던 통인에게 저항하다 살해된다. 사람이 한을 품고 죽으면 귀신이 된다. 한을 품고 죽은 아랑은 부임하는 사또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려고 귀신이 되어 나타나지만 기가 허약한 사또들은 아랑을 보자마자 죽어 버린다. 그러던 중 담이 큰 사또가 부임해 아랑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살해범을 잡아 단죄하고 시체를 찾아 장례를 잘 치러 주어 귀신 아랑의 한을 풀어주었다. 이 귀신 아랑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귀신 이야기의 전형이다. 내용은 조금씩 달라도 억울하게 죽은 사연 있는 귀신의 한을 풀어주고 함께 잘 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상생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고마워 연진아!’ 

더 글로리 문동은은 가해자 연진에게 복수를 시작하며 뻥 뚫리는 한 마디의 역설을 던진다. 한국인들에게 한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풀이했던 것처럼 어둡고 퇴영적인 정서가 아니다. 한은 소모적 정서가 아니라 한풀이를 향한 강한 에너지원이다. 처참한 삶 속에서도 동은을 버티게 한 힘은 복수를 위해 가슴에 새긴 한이었다. 한은 우울감에 빠져 낙담하고 포기하게 두지 않는다. 한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강한 에너지 원이 되어 한풀이로 나아가게 한다. 한국인들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할 수도 있다. 한국인에게 한은 초자연적인 강력한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옆 나라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애증의 대상이고 한 맺힌 나라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에 당한 치욕의 역사는 여전히 한이 되어 한국인의 가슴속 깊이 박혀 있다. 특히 일제식민지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인에게 일본에 대한 한은 살아있는 감정이다. 그런 이유로 아무리 일본이 세계 최고 경제대국이라고 해도 한국인들 눈에는 그저 ‘일본 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스포츠 경기를 하더라도 절대로 일장기 아래 태극기를 걸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국인들의 정서다. 일본에 대한 응어리진 한 때문이다. 


일본에 대해 쌓인 한은 역설적이게도 전후 한국이 단기간에 일어설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상당했지만 한국인들은 일본만은 따라잡겠다는 강한 의지 하나만으로 기업과 국민, 국가가 합심해서 일본을 베끼고 따라 하면서 성장했다. 물론 기업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한 일이지만 그 속에는 분명 일본만은 반드시 이겨보겠다는 한의 정서도 한몫했다는 생각이다. 한일관계 개선을 외치는 정치인들은 한국인의 이러한 일본에 대해 켜켜이 쌓인 응어리진 한의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사죄와 사과도 없이 위안부 문제나 강제노역 문제를 결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전설의 고향 속 억울하게 죽은 귀신의 한을 풀어주는 일도 그 첫 번째가 사죄였고 사과였다. 그다음이 당사자에게 죗값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한일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은 사죄와 사과가 먼저다.


한국인의 역사는 시련과 고난의 역사였다. 그 역경을 견뎌낸 힘은 은근과 끈기, 인내였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은근과 끈기로 참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참아내는 것이 필수였다. 그렇게 풀 것 풀지 못하고 꾹꾹 눌러 담았으니 한이 쌓인다. 그러다 보니 화병이라는 한국인만의 병도 생긴다. 하지만 ‘내고 달고 맺고 푸는’ 세상이치를 알고 있었던 조상들은 맺힌 한이나 화를 그냥 두지 않았다. 맺힌 한과 화를 한풀이, 화풀이로 반드시 풀어주었다. 


‘한국 문화는 한을 푸는 한풀이 문화다’ 이기동 전 성균관대 교수의 말이다. 한국인들은 시련의 슬픔조차 증폭시켜 한풀이로 승화시키는 놀라운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한국인에게 한은 그저 품고 있는 고통스러운 정서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한을 담아두지 않고 한풀이로 승화시켜 생산과 추진력의 에너지원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한국인 에너지원 한과 한풀이 정서가 K-바람에 밑거름으로 작용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도시의 아파트 숲 속에도 새소리가 요란하다. 환경이 좋아져서 그런 것인지 새벽잠이 없어진 탓에 듣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새소리가 더욱 시끄럽다. 시끌벅적 지저귀는 새소리가 오늘 하루 벌레 많이 잡자는 파이팅 하는 새들의 웃음소리로 들리고 희망찬 하루를 시작하는 밝은 노랫소리로 들린다. 한국인의 한의 정서를 공부하고 나니 이제 새소리가 울음소리가 아니라 노랫소리로 들린다. ‘내가 한을 제대로 공부하긴 했구나’하는 생각이 스치는 아침이다. 


오늘 당신에게 새소리는 어떻게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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