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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Feb 01. 2024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모든 것을 내놓고 떠난 시대의 어른

1. 간단 소감: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책의 첫 페이지를 폈을 때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이 한 줄 눈길을 잡았다. 이 책은 이어령 선생이 죽음 직전 암투병 중일 때 저자 김지수가 ‘라스트 인터뷰’ 형식의 대화를 토대로 쓴 책이다. 둘 사이를 자세하게는 모르겠으나 책을 읽으며 스승과 제자 간의 진심이 담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도 있는데 지금 K콘텐츠로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탄생 요람 한국종합예술학교를 탄생시킨 이가 바로 이어령 선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초대문화부장관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5분 연설로 각 부처 반대를 이겨내고 통과시켰다고 회고한다. 여하튼 우리는 이어령이라는 시대의 천재 지성인을 떠나보냈다. 세상 죽음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 어디 있을까 마는 혼란스러운 요즘 그의 혜안이 그립다. 그러는 중에도 자꾸 읽는 중에 이어령이라는 희귀한 천재를 만나 죽음직전 그의 지식과 지혜라는 선물을 직접 받은 김지수라는 사람이 부러웠다. 인간의 시기 질투심의 끝은 없는 것인가? 분명한 또 느낀 점은 나도 한낱 새털같이 가벼운 인간이라는 것. 

2. 인상 깊은 문장들

-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소크라테스도 그랬고 몽테뉴가 그랬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가 그랬다.

←나에게는 이런 스승이 있는가? 한없이 내 삶이 작아진다.


-무엇보다 스승은 내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태초에 빅뱅이 있었어. 물질과 반물질이 있었지. 이것들이 합치면 빛이야. 엄청난 에너지지. 그런데 반물질 보다 물질이 더 많으면? 빛이 되다 만 물질의 찌꺼기가 있을 것 아닌가. 그게 바로 우리야. 자네와 나지. 이 책상이고 안경이지. 이건 과학이네. 상상력이 아니야. 우리는 빛이 되지 못한 물질의 찌꺼기, 그 몸을 가지고 사는 거라네. 그런 우리가 반물질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 빛이 되는 거야.

←와우. 이건 뭐. 이어령 선생을 괜히 천재라고 했던 게 아니었네. 지난번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서 얻었던 ‘우리는 별에서 왔단다’에 대한 퍼즐이 풀렸다. 그렇구나. 우리는 빛이 되다 만 찌꺼기.


-난 매번 KO패 당했어. 그래서 또 쓴 거지. 완벽해서 이거면 다 됐다, 싶었으면 더 못 썼을 거야. ‘갈매기의 꿈’ 리처드 바크는 갈매기 조나단의 생애를 쓰고 자기 타자기를 바닷속에 던져 넣었다잖나. 그걸로 다 썼다는 거지. 난 그러지 못했네. 내가 계속 쓰는 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야.

←나도 죽을 때까지 써야 하겠군. 운명이야.


-스스로 쓸 말이 없어서 남의 얘기나 옮겨봐. 그건 서생이지. 글자를 쓰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아닌 거야. 사람들은 글씨 쓰는 사람과 글 쓰는 사람을 혼동하는데, 글씨 쓰는 사람은 서경이네. 베끼는 사람. 

←그러니 독서 감상문은 그저 감상 글을 빙자한 남의 얘기 옮기기. 글자 쓰는 사람. 연습생.


-지금까지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고들 알고 있으니 어이없는 노릇이야. 증기기관을 만든 사람은 토머스 뉴커먼이네. 그 사람이 만든 증기기관이 백 대 이상 있어서 탄광에서 물도 퍼내고 있었어. 와트는 그걸 개량해서 효율을 높인 사람이거든.

←아뿔싸 그랬구나. 나도 와트인 줄로만… 증기기관 발명은 제임스 와트가 아니라 토머스 뉴커먼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아?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 방울이야.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네. 그래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죽음이 코 앞에 있다는 걸 알려줬거든.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네.


-예술가라면 그동안 사회가 덮어왔던 것들을 까발려야지. 한 꺼풀 한 꺼풀. 죽음이라는 게 뭔가, 산다는 게 뭔가, 친구가 뭔가, 사화가 뭔가….

←그게 예술가의 운명이다. 카르페 디엠! 나도 예술가에 대해 쓰긴 썼는데.. 

https://blog.naver.com/junbh1/223321986630 참조


-아침에 눈이 와 있으면 좋은 이유는 변화,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 버린 거야.(중략)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아름다운 쿠데타지

←와 아침 눈 내린 것을 ‘아름다운 쿠데타’라니.. 인정!


-장미 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 죽음의 가장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야. 고향이지


-고난에 처했을 때 인간은 비참해지거나 숭고해지거나 두 부류로 갈린다.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죽음을 기억하게나.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3. 추천 혹은 권유는?

서점에서 지나다가 대충 훑어보고 난 뒤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이어령 선생 책은 거의 다 읽었는데 이 책은 왠지 선뜻 내키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글자 때문에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작동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운명인지 다시 만나 읽어보니 진작 읽어볼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앞둔 노지성인의 마음이 읽는 내내 평화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동안 다른 책에서도 몰랐던 그의 업적(예를 들어 초대문화장관시절 한예총을 세운 일, 노견(路肩)이란 말을 갓길로 바꾼 사람 등)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다. 


평생을 다양한 분야에서 워낙 탁월한 업적을 내며 살다 간 사람이라 인간계가 아닌 사람 같아서 멀게 생각되지만 우리 주변에는 믿을 수 없는 천재들이 항상 존재해 왔으니까 그려려니하고 읽으면 된다. 워낙 다방면에 대한 얘기가 들어 있으니 그냥 한 천재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로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읽는 내내 부럽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며 재미있게 잘 읽었다. 예술가 흉내를 내며 사는 지금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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