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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홈즈 Feb 19. 2024

비 냄새를 아시나요?

술비 내리는 비요일 감상

나는 호(好)비족이다. 비가 오면 마냥 좋다. 비 내리는 날이면 마음이 잔잔해지고 내면 깊숙이 어떤 느낌이 꿈틀거린다. 그 느낌은 묘해서 기분 좋다는 말로는 설명이 잘 안 된다. 그 비 중에도 나는 세차게 때리는 비보다 소리 없이 내리는 가랑비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가랑비족이다.


한겨울 빼고는 비를 만날 수 있으니 호(好)비족인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복이라면 복이다. 우리나라는 사실 겨울철에도 날씨가 조금만 풀리면 겨울비가 내리니 사시사철 비가 내린다고 봐도 된다. 이렇게 사시사철 내리는 비는 똑같은 것 같지만 계절마다 그 느낌과 감상이 다르다. 봄날 내리는 비는 대지를 두드려 생명을 깨우는 비이고, 여름철 시원하게 뿌리는 비는 성장을 재촉하는 비다. 결실을 마친 늦가을에 내리는 비는 추억을 소환하는 비고, 겨울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봄을 재촉하는 비다. 이렇게 시기마다 내리는 비에는 그 어울리는 아름다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몇 년 전 알게 되었다. 그때 써 놓은 글이 있다.

(참조:지구상 가장 말맛 나는 말 https://blog.naver.com/junbh1/223240813653  ) 

‘우리말에는 비가 내리는 모양새나 시기 등에 따라 세분하여 다양한 이름이 붙는다. 안개비, 이슬비, 가랑비, 보슬비, 작달비(장대처럼 내리는 굵은 비), 모다깃비(뭇매를 치듯 내리는 세찬 비) 같은 내리는 모양이나 양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있고, 해가 떠 있는 동안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고 부르고 오란비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장맛비도 있다. 여기에 봄에는 일이 많아 비가 와도 일을 한다고 해서 일비, 여름에 오는 비는 봄보다 한가하다고 해서 비가 오면 잠을 잘 수 있는 잠비, 가을에는 추수가 끝난 뒤라 비 오면 떡을 해 먹을 수 있다 해서 떡비, 겨울에는 농한기라 비가 오면 술 먹고 놀기 좋다 해서 술비라고 부른다. ‘비’라는 명사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니 참으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다. 정말 지구상 최고의 말맛 나는 말이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비 냄새를 아시는가? 내가 비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비 냄새 때문이다. 초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비릿한 비 냄새를 모르는 사람에게 비는 그저 구질구질한 날궂이일 뿐이다. 시골집 마루에 누워 오래된 마루 향에 섞여 콧구멍을 간질거리는 비 냄새를 모르면 비를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나른한 오후 소곤거리는 빗소리와 비 냄새에 취해 스르륵 감기던 낮잠의 맛을 모르면 비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다.

비 냄새: 이런 과학적인 이유를 알면 비 냄새 맛이 뚝 떨어진다.

치기 어린 대학생 시절 나와 몇몇 친구들은 '술비'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비 오면 술 마시는 모임이 많았었다. '우주회'니 '비사랑'이니 하는 이름으로 무리 지어 술 마시는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술비’ 그런 모임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당시는 다른 패거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도 나름 특별한? 이름인 ‘술비’로 지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우주회'나 ‘술비’나 도긴개긴 아닌가. 참으로 유치 찬란한 시절이었다. 술비 모임 규칙이란 게 참으로 유치하다. 모임이 술비니 비가 오면 당연히 술 마셨고, 비 안 오면 비 오길 기다린다는 이유로 마셨다. 짐작했겠지만 매일 술 마시자는 모임이었다. 뭐 몇 달 하다가 군대 가고 어쩌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이면 가끔 그 친구들이 생각난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책에 푹 빠졌던 기억이 있다. 비 좋아하는 호비족 청년 시절의 이야기다. 그녀의 독일 유학 생활 이야기를 읽으며 부슬부슬 비 내리는 안개 뿌옇게 낀 슈바빙 거리를 언젠가 꼭 가보겠다는 목표를 세웠었다.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여 년이 흘렀다. 전혜린이 묘사해 놓았던 그 안개 낀 슈바빙 거리는 여전히 궁금하다. 지금이야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져 꼭 가보고 싶다는 마음은 없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은 한다.


입춘도 지나 새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온 동네가 안개로 자욱하다. 아직 완연한 봄날은 아니고 정월 대보름도 지나지 않았으니 오늘 내리는 비는 술비로 불러도 되겠다. 술비 내리는 비요일, 잊었던 슈바빙 거리가 생각나며 허름한 술집에서 친한 동무와 술 한잔하고 싶은 날이다.


어라? 그런데 오늘이 모란 장날이네. 비 오는 모란 장날인데 장돌뱅이 놀쇠족, 호비족인 나는 오늘 하루를 참을 수 있을까?


☞책 소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 민서출판사,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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