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이런 것까지 다 K
70~80년대 일본 여행이나 출장 갔다 오는 사람들의 인기 쇼핑 품목에 ‘밥솥’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브랜드도 정해져 있었다. 바로 조지루시사의 ‘코끼리 밥솥’이었다. 한국인들은 이 제품을 코끼리가 그려져 있어 ‘코끼리 밥솥’이라 불렀다. 당시 우리나라 밥솥들은 하루만 지나도 밥이 누렇게 변하며 냄새가 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 가전왕국으로 불렀던 일본의 밥솥이 주부들의 로망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코끼리 밥솥이 있는 집이라면 좀 산다는 축으로 인정받으며 괜히 어깨를 으쓱거리던 시절의 얘기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자 일본 여행객이 급격하게 늘었다고 한다. 여행업을 하는 후배와 술 한잔 하며 시시덕거렸던 얘기가 떠오른다. 일본 여행 귀국길에 호텔에 쇼핑한 밥솥을 두고 왔다는 할머니 때문에 쇼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니 우리나라 밥솥이 얼마나 좋은데 그 무거운 것을 일본에서 사셨는지’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MSG 치지 말라며 믿지 않으려 했지만 사실이라고 핏대를 세우니 얻어먹는 주제에 믿기로 했다. 아직도 MSG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지만 그저 코끼리 밥솥으로 해 먹던 밥맛을 아직도 못 잊는 할머니였거나 코끼리 밥솥에 사연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진짜 아직도 일본에서 코끼리 밥솥을 사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70~80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거나 일본 추종자임이 분명하다.
이제 코끼리 밥솥의 시대는 갔다. K-밥솥 시대다. 현재 동남아를 중심으로 쌀밥 문화를 가진 나라 주부들의 최애 아이템은 바로 한국산 밥솥이라고 한다. K-밥솥은 어떻게 세계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K-밥솥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한류, K-콘텐츠의 영향도 있겠지만 역시 기술력이다. 밥솥 업체들은 한국인 특유의 섬세함과 현지화 전략을 잘 세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탁월한 코팅 기술로 밥이 눌어붙지 않게 한다거나 동남아 안남미 특성에 맞게 찰진 밥을 지을 수 있는 기술 등을 개발했다. 여기에 보온 기능 등 다양한 기능도 정착시켜 최고 성능의 제품으로 시장을 공략하니 현지 주부들이 K-밥솥에 빠질 수밖에 없다.
K-밥솥의 탁월한 기술력 개발 동인에는 치열한 경쟁도 한몫했다. 국내 밥솥 시장은 ‘쿠쿠’와 ‘쿠첸’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선도 기업인 쿠쿠를 후발주자인 쿠첸이 추격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양상이다. 양사는 좁은 국내 시장 환경에서 까다로운 K 고객을 상대하다 보니 기술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밥솥 시장에도 1등 주의, K-경쟁 유전자, 생존 유전자가 작동하니 최고의 제품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양사는 까다로운 국내 고객을 상대하면서 얻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해외시장 공략에도 독보적 혼종 문화 창조자답게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현지화하니 쌀을 주식으로 하는 세계인들도 점점 K-밥솥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처럼 경쟁하는 맞수의 존재는 서로 피를 말리지만 성장의 강한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K-경쟁 유전자의 위대한 힘이다. 여하튼 K-밥솥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