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우리들

우리의 힘

by 청년홈즈

우리말 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우리들


“우리, 우리?”

갑자기 어설픈 우리말이 날아들었다. 돌아서 눈을 마주치자 수줍게 웃던 아주머니 한 분이 도망치듯 가게 안으로 숨었다. 잠시 후 젊은 여인의 손에 끌려 나온 아주머니는 수줍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젊은 그녀는 유창한 영어로 시어머니가 요즘 K드라마에 빠져 있는데 한국인만 보면 저렇게 좋아 어쩔 줄을 모른다고 했다. 우리는 마치 한류스타라도 된 양 수줍어하는 아주머니 손을 꼭 잡으며 다시 인사를 나눴다. 몇 년 전 미얀마 양곤의 세꼬랑 꼬치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방인의 한국어 질문도 그렇고, 낯선 땅에서 듣는 '우리'라는 말이 생경스러워 여전히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아주머니가 그리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를 외친 것을 보면 한국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는 ‘우리’라는 말이 정말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우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 지를.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쓰는 일상어 곳곳에는 우리라는 말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우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말하는 이가 자기와 듣는 이, 또는 자기와 듣는 이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나를 포함한 조직 또는 집단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한국인들은 이 우리라는 말을 더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한다. 우리 집, 우리 아들, 우리 딸, 우리 할아버지, 우리 아버지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우리 애인, 우리 마누라쯤 오면 my문화에 익숙한 서구인 입장에서는 난감하다.

“우리 애인이라니? 아니 애인을 공유한다고?”


국어학자 유창돈(1918~1966, 친족칭호의 어원적 고찰-1954) 선생은 우리의 어원에 대해 울타리의 ‘울’과 같은 어원이라고 설명한다. 울타리 안에 가두는 ‘돼지우리’나 ‘염소우리’처럼 우리는 같은 울타리 안에 들어있는 동족이다. 그러니까 동질감을 느끼면 같은 울타리 안에 든 우리 편, 우리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이처럼 같은 우리 안의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한 덩어리 우리로 여긴다.


이렇게 한국인들의 언어습관 속에 우리라는 말이 들어앉게 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를 한국인의 농경중심 문화에서 찾는다. 한국인은 다른 사안은 몰라도 농사에 임하면 서로서로 돕는 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농사를 인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경작환경에서 한 사람의 노동력은 대단히 귀했다. 속담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망종에는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 ‘소서 때는 새각시도 모 심어라’ ‘가을 것 못 걷어 들인 놈 겨울 넘길 생각 마라’

사계절이 있는 경작환경에서는 때를 놓치지 않아야 했다. 때를 놓쳐 농사를 망치게 되면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기 힘들었다. 뭉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고, 한 사람의 노동력이 곧 나의 생존과 직결되었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했다. 공동경작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공동경작을 위해 두레공동체를 만들었고, 품앗이 문화가 생겼다.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는 공동노동뿐만 아니라 생활전반을 아우르는 마을 공동체문화로 발전했다. 바로 덩어리 우리 공동체 문화다. 척박한 환경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야 생존 확률도 더 높아졌고, 한 덩어리가 되어야 전쟁이나 천재지변에서 나와 가족을 보호할 수 있었다. 성씨가 달라도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공동 운명체였다. 가족과 같은 한 식구나 마찬가지여서 남이 아닌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이 되었던 것이다. 덩어리 우리 공동체 문화가 우리라는 언어습관으로 스며든 것이다.


이처럼 덩어리 우리 공동체 문화를 가진 한국인들은 잘 뭉친다. 우리는 함께 뭉치는 우리 힘으로 전쟁폐허국에서 지금의 경제대국을 이루었고,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문화강국 K를 만들었다. 바로 '우리'라는 말속에 들어 있는 뭉치는 힘이 한몫했던 것이다. 이렇게 잘 뭉치는 우리 문화를 깔아뭉개고 친일사관을 주입하여 당쟁만 일삼던 모래 같은 민족이라고 주입했던 일재의 만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하고 비열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미 우리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덩어리 우리 공동체의 힘도 모른 채 자긍심과 주체성도 없이 친일사관 찌꺼기를 재잘거리는 자들은 그저 멍텅구리일 뿐이다.


잘 뭉치게 하는 덩어리 ‘우리’ 문화지만 종종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바로 변질된 패거리 문화다. 한국정치사에 회자되는 ‘우리가 남이가?’ 사건은 수준 낮은 패거리 정치의 한 장면이다. 신기한 것은 이렇게 패거리로 나뉘어 싸우다가도 전쟁이 나거나 해결해야 할 공동의 목표가 생기면 다시 우리가 되어 한 덩어리로 뭉친다. 일제 강점기 이념을 넘은 독립군들이 그랬고, 가까이는 5.18 광주 시민군들이 그랬고, 87년 6월 항쟁 때 휴지를 나눠주던 평범한 시민들이 그랬다. IMF로 국가부도가 나자 모두 우리가 되어 금 모으기에 나섰고, 서해안유조선 침몰로 기름유출이 발생하자 온 국민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우리의 힘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씨유어게인’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엔딩 대사다. 군복도 없이 구식 총을 들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던 의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루하루 살아 내기도 벅찼던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기 삶을 지켜주지도 못한 조국을 위해 싸우려 했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 속에 들어 있는 그저 우리를 지켜내기 위한 그 마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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