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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르 Feb 21. 2019

늦어서 따뜻했던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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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부터 입맛이 없었다. 입안이 떫고, 평소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도 묽게만 느껴졌다.

점심에는 평소처럼 요가를 갔고, 요가가 끝나면 늘 그렇듯 내 위장은 음식을 원하지 않았다. 위장의 에너지는 지금 어디로 가서 요긴히 그들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걸까. 혹시 어쩌면 다른 기관들이 역할을 하게 하느라, 그들은 자신들의 숨을 정지시켜 잠시나마 현실의 음식으로부터 나를 구원하고 싶었을 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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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하다가 오후 3시가 되니 슬슬 허기가 졌고, 무작정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원래는 회덮밥이 먹고싶었는데, 3시에 마땅히 회덮밥을 먹으러 갈 곳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체인점인 분식집엘 들어갔다. 생각보다 깔끔하고 넓은 내부에 놀랐는데, 내가 더더욱 놀랐던 사실은, 내가 주문하는 곳까지 쭉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인사를 두 번이나 건네주셨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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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인사는 나를 놀라게 했다. 요즘은 가게에 들어갔을 때 어서오세요 하는 인사를 그렇게 자주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나는 어서오라는 그 말이 손님으로써 '나는 당신을 손님으로써 존중하며, 당신에게 가치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내가 여기에 있소. 자 나는 이제 당신의 요구를 들을 준비가 되었소.' 라는 의미로 들린다. 두 번의 어서오세요는 나에게 오묘한 신뢰감을 주었다. 회덮밥이 없어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겠다, 과연 무엇을 먹어도 기분이 좋을것 같다는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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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빙해주시던 아주머니는 내가 앉은 테이블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 티슈, 노랗고 얇은 단무지 10장과 뭉둥한 조각들로 잘려진 김치를 놓아주시며 일하다 점심시간을 놓친거냐 물어보신다. 네, 영혼없이 대답했고 나는 이어폰을 빼지도 않았다. (에어팟의 장점은 안빼도 다들린다.)

아이고.. 그래도 끼니는 제 때에 챙겨먹어야죠. 배고프겠어요. 하긴, 우리 아들도 끼니는 제 때 안 챙겨먹어도 게임은 꼬박꼬박 하더라.

끼니를 제 때 챙겨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인데, 아주머니의 이 한마디는 내가 지금껏 살면서 가족 이외 중년이상의 여성을 통해 들은 말 중 가장 애정깊게 들렸다. 밥을 먹으면서 훑어보니, 아주머니는 성격 그 자체로 푸근한 말을 톡톡 건네주는 사람이었다. 맞은 편의 대머리 아저씨는 시켰던 밥을 깨끗히 다 먹고 나갔는데, 그릇을 치워주시며 "아이고~ 깨끗하게 다 드셔 주시니 제 기분이 좋네요!" "이모님~ 이모님이 밥을 너무 맛있게 해주셔서 아저씨가 밥을 다 드시고 나가네요!" 하시는 걸 보니, 그릇을 싹싹 비워야 겠다는 사명감 마저 불타올랐다. (하지만 내 앞에 있던 나랑 비슷한 또래 여손님에게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기준이 있나?)

마치 미션을 달성하듯 떡과 만두를 모두 클리어하고 (국물까지는 무리였다.) 잘 먹었습니다. 하며 나가려는데, 안녕히 가세요! 앞으로 끼니는 제때 잘 챙겨먹어요! 하는 아주머니의 말이 고마우면서 동시에 화가났다. 우리 엄마를 떠올리게 해서, 정확히 말해서 우리 엄마랑 비교하게 해서.

우리 엄마가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저 아주머니가 뭔데, 처음 보는 나에게 이렇게도 따뜻하게 건네는 걸까. 우리 엄마도 어쩌면 저렇게 말했을 수도 있잖아. 정상이었으면 그랬을 수 있잖아. 내가 밥은 제 때 잘 챙겨먹고 다니는 지, 요즘 힘든 일은 없는 지. 물어봐줄 수도 있는거잖아. 근데 우리 저 아주머니가 뭔데 우리 엄마보다 다정한데. 나말고 비슷한 또래의 다른 여손님도 한 명 더 있었는데, 왜 나한테만 그렇게 살갑게 끼니를 제때 챙겨먹으라고 얘기해주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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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에는 끼니에 맞춰서 밥을 먹으러 가야겠다. 그럼 아주머니의 기억속에서 나는 분주한 점심시간에 찾아오는 3번 테이블의 여자 손님으로 기억되겠지. 

아니, 나는 매번 아주 어정쩡한 시간에 그곳으로 밥을 먹으러 갈 것이다. 손님이 없고 한산해서 내가 제 때 밥을 챙겨먹지 않는 것을 걱정해주는 아주머니의 정이 좋으니까. 그 따뜻함이 우리 엄마의 차가운 빈 자리를 메꿔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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