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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Sep 19. 2020

페인터스 블록(Painter's Block)

누구에게나 불이 꺼지는 시간은 있다

a page from my sketchbook (2020), 진청


글 쓰는 이가 글을 쓸 영감이나 의욕을 잃은 상태를 말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처럼, 그림 그리는 이에게도 그림을 그릴 영감이나 의욕을 잃는 페인터스 블록(Painter's Block)이 존재한다.


지금 내가 딱 페인터스 블록을 겪고 있는 중이다. 새하얀 종이와 캔버스에 물감을 묻힐 엄두가 나지 않고, 작업 중이던 그림들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번 주는 내내 작업실에서 야작을 했는데도 큰 성과가 없었다.


올봄부터 가을까지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았던 프로젝트가 얼마 전에 끝이 났는데, 마음이 허하고,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잃었다. 불과 몇 달전까지 어떻게 그림을 쉴새없이 그렸는지 잘 모르겠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페인터스 블록은 현재까지 약 3주 정도 지속되고 있다.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에, 페인터스 블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들도 혹시 비슷한 상황을 겪었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극복했는지 등을 찾아봤다.


피카소는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 후, 매일 같이 가던 2층 작업실에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스스로의 드로잉과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격분할 정도였다고 한다. 피카소는 결국 이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시를 썼다.


추상화가 아그네스 마틴은 1967년 그림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무려 7년 동안이나 신작을 내지 않았다. 심지어 그 공백기 중에는 그녀가 소지했던 화구들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7년의 후, 마틴은 전에 없던 천상의 색감을 담은 그림들을 세상에 내보였다.


조지아 오키프도 큰 프로젝트를 맡은 상황에서, 세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는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불안증세로 뉴욕의 한 병원에 한동안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뉴멕시코로 거처를 옮겼는데, 여기서 본 풍경들이 이후 작업의 원천이 된다.


2014년 미국에서 출간된 <크리에이티브 블록(Creative Block)>의 저자 다니엘 크리사는 거의 모든 창작인이 어떤 시점에서 막힘을 경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위에 나열한 위대한 작가들로 불리는 이들도 일종의 페인터스 블록을 겪었는데, 범인인 내가 겪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름까지만 해도 그리고 싶은 이야기들과 이미지들이 화염처럼 솟아올랐는데, 지금은 다 써버린 초처럼 불을 억지로 붙이려 해도 불이 붙지가 않는다. 그렇지만 자책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어쩌면 가진 걸 모두 태울 정도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찾아온 것일 수 있으니까.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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