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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청 Sep 21. 2020

사장님, 볼로냐에서 뵙겠습니다!

퇴사의 말

Blue flowers (2020),  진청



내가 다닌 출판사에는 꽤 큰 규모의 그림책 자회사가 있다. 나는 성인책 분야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림책 팀과는 아예 다른 층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그림책 편집자분들이랑은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림 없는 책을 내는 성인책 분야의 일도 배우고 즐기며 하고있었지만, 그림 그리는 삶을 항상 마음 한 켠에 지니고 회사를 다녔던 나는 그 점이 아쉬웠다. 그러던 중 모든 계열사가 모이는 신년회 때 그림책 자회사의 사장님을 우연히 계단을 오르는 길에 만나게 되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마주칠까 말까 한 분이었기 때문에, 아무 맥락도 없이 갑자기 사장님께 말을 걸어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랩을 하듯이 어필했다.

옆에 다른 사람들도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패기와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사장님께서 나란 존재가 있다는 걸 아시게 되었다.


사장님을 두 번째로 뵌 것은, 퇴사를 할 때였다.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고 퇴사를 한 것이기 때문에, 사장님께 꼭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리고 피드백을 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장님께서는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유명하신 분인지라, 말을 걸기 쉬운 상대도 아닐뿐더러, 수많은 멋진 그림책들을 출간한 안목 있는 전문가이신 만큼,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리러 가는 길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똑똑. 노크를 하고 사장님의 아우라로 가득차 있는 공간에 들어섰다.

사실 너무 떨어서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미리 뽑아둔 그림 인쇄물들과 더미북들을 보여드렸고, 사장님의 내 그림을 훑는 시선을 초조하게 따라갔다. 사장님께서는 채찍 90%, 당근 10% 정도 비율의 피드백을 주셨다.


그렇지만 혼자서 계속 준비를 했던 내게는, 전문가의 피드백이 정말 절실했기 때문에 채찍 같은 피드백도 하나하나 소중하게 여겨졌다. 더 공부하고 발전하겠다고 퇴사까지 한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있는 건 당연지사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어떻게 얼마나 발전했는지다.


어찌 됐든, 나는 퇴사 전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책 도서전이 매년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열린다. 우리 팀은 매년 런던도서전이나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가지만, 그림책 팀은 볼로냐 도서전에 간다. 그림책 팀은 볼로냐 도서전에서 눈에 띄는 그림책들의 판권을 수입해오고, 한국 그림책들의 판권을 수출하기도 한다. 그래서 볼로냐 도서전은 모든 그림책 작가들의 꿈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을 큰 소리로 냈다.

"사장님, 볼로냐에서 뵙겠습니다!"


그때 사장님께서 처음으로 씨익 웃으셨다.


인스타그램: @byjeanc

웹사이트: https://www.artbyjea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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