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회상

by 지은

아파트의 곳곳은 계절의 놀이터였다. 아파트의 규모가 클수록 군데군데 놀이터가 몇 개나 됐지만, 정형화된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큰 호기심을 채운다는 건 꾀나 어려운 일이었다. 놀이터에는 매일같이 똑같은 미끄럼을 타며 똑같은 그네를 타는 친구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지만, 놀이를 더 키우고 싶은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중 율이는 조금 다른 케이스였다. 놀이터에 아이들이 많으면 놀이터를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텅 빈 놀이터를 보며 “엄마, 지금이야”를 외치며 놀이터로 달려가는 아이를 보며 아직 어린아이에게 무언가 불편한 게 있었나 보다 여기게 되었다. 친구들과 조금 다른 율이를 보면서 살짝 불안할 때도 있었지만, 굳이 놀이터가 아니더라도 놀거리는 사방에 널렸으니 괜찮다고 애써 나를 위로했었다.

율이 22개월 겨울에 크고 고운 하얀 눈이 많이 내렸다. 이제 율이가 어느 정도 커서 눈을 만지며 놀면 정말 재미있겠다 싶어 “율아 눈 놀이하러 갈까?” 했더니, 율인 흰 눈 맞은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서둘러 필요한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지만 아가씨 때 끼던 스키 장갑조차 보이지 않아 난감했다. 그렇다고 가죽 장갑을 끼고 눈을 만질 수도 없고 어쩌나 싶던 차에 눈에 들어온 설거지용 고무장갑, 차가운 고무장갑만으론 무리겠다 싶어 목장갑을 찾아 고무장갑 안에다 끼었다. ‘썰매는 어쩌지?’ 아이의 첫눈 놀이에 미쳐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음에 내가 먼저 김이 샜지만 이내 커다란 비닐 쇼핑백을 찾아냈다. ‘아싸~~ 이만하면 훌륭해~’


한겨울이라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그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흰 눈을 밟는 아이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온몸을 웅크리고 밟으면 사라질까 살금살금 걷는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이의 장갑도 준비가 안됐던 터라 아이가 맨손으로 만지는 눈은 날 것 그대로였다. 따뜻한 온기가 있는 율이의 작은 손에 전해진 차가움을 느끼며 물로 변해 손바닥에서 없어지는 눈을 보고 율인 마냥 신기해했다. 계속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차가움이 고통이 되어 돌아올 것이었다. 아이는 차가우면 버리고, 다시 눈을 움켜쥐었지만, 두 살배기 아이의 손은 아직 야물지 못했다. 그대로 풀어져 버리는 눈을 보며, 엄마가 움켜쥔 눈은 눈덩어리가 되어 돌아온 다는 사실에 아이는 놀라워했다.


“엄마, 또. 또”

“율이 눈덩이 또 만들어줄까”


눈덩이 수십 개를 만들어 아이가 던질 수 있게 놓아주었다. 아이는 눈덩이를 던지고, 부딪쳐 깨지는 눈을 쉼 없이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참을 신나게 놀다가 아이를 비닐백에 넣었다.

“율이 썰매 태워 줄게”

비닐백 손잡이가 짧아 손잡이를 잡고 끄는 내 등이 휘어졌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속도를 내는 내 몸에선 땀이 났다. 온몸의 근육이 이제 그만~ 하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난 그 신호를 받으며 내일은 근육통으로 미라가 되어 걷고 있을 생각을 하니 겁이 났다. 하지만, 꺄르륵, 까르륵 아이의 웃음소리는 당장 내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율이의 웃음소리에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하나 둘 우리 주위로 몰려들었다. 모두들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박스나 비닐을 하나씩 가지고 왔다. 아파트의 한 귀퉁이는 썰매장으로 변했다. 썰매를 타는 아이들의 함박웃음이, 쌓인 함박눈만큼이나 하얗고 곱다.

아이들의 재잘 됨이 자연과 꾀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때쯤 놀고있는 아이를 데리러 한 엄마가 왔다. 아이들 사이에 섞여 고무장갑을 끼고 노는 나를 보며 그 엄마는 미간에 인상을 지었다. 내가 건넨 인사는 눈 밭으로 미끄러졌고, 아이손을 낚아채 듯 데리고 가버렸다. 나를, 아이들을 놀이에 끌어 들인 주동자쯤으로 보는듯 했다. 아이가 타다 놔둔 박스만이 덩그렇게 남겨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이들은 그 광경을 보며 엄마손에 끌려갈 바로 앞의 미래를 그렸을까? 둘셋의 아이가 서둘러 떠났다. 주인이 떠난 그 자리에 비닐썰매만이 자리를 매우고 있었다.

씁쓸했다. 쓸쓸하기도 했다. 쓸쓸함이 내 등에 흘러내린 땀방울을 식혔다. 남아있는 아이들이 나를 바라본다. 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 속력으로 아이의 썰매를 끌었다. 썰매를 끌다 다른 친구들의 썰매와 박치기도 하고, 그럼 그 충격에 쓰러지기도 하며, 아이들은 신이 났다. 박치기를 하려고 아이들은 더 세차게 달렸다. 겨울의 시간은 어둠을 빨리 데리고 왔다. 나는 율이를 위해 좀 더 놀아도 됐지만, 신나게 놀다가 집에 돌아가 혼날 아이들이 걱정돼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종일 밖에서 눈 놀이하다 집에 들어온 율이의 발그레한 볼이 어여쁜 사과 같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아이를 앉혔다. 욕조의 따뜻한 물이 아이의 근육을 살살 흔든다. 신나게 논 아이는 순했다. 짜증도 없고, 말도 잘 들었다. 그 날 헤어진 아이들도 모두 그랬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어떤 엄마는 우리 아이 잘 놀다 들어왔구나 하며 엉덩이를 두드려 줬길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아이들은 신나는 걸 좋아한다. 아이들 스스로 신나는 걸 찾아서 논다면, 그것이 위험한 일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문득 엄마 손에 끌려간 아이가 생각났다. 무엇이 그 엄마를 화나게 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에 내 기분이 나빠 지려 했다. 율이가 피곤했는지 금방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김치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한 캔 꺼내 들었다. 그 엄마의 잔상 위로 다른 아이들의 젖은 옷을 벗기는 엄마를 붙들고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