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바닥난 자존감이란 녀석은 웬만해선 잘 채워지지 않는다. 다 채웠다고 믿는 순간 다시 바닥을 드러냈다. 채우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녀석이다. 자존감이란 내 고유의 것이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채워야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난 왜 나를 존중하지 않는 걸까.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 화가 났다.
초콜릿이 필요하다.
극강의 구체적인 단맛. 진갈색의 액체가 될 때까지 오도독 오도독 씹어서 삼키고 싶다.
그러나 코로나로 움직임이 제한된 삶을 살다 보니 얇은 지방층이 겹겹이 쌓여 칼로리를 소모하기가 힘들어졌다. 난 구체적인 단맛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삼킬 용기는 없는 상태인 것이다. 마음대로 먹을 수 조차 없는 현실이 슬펐다. 때문에 한층 더 단단해진 짜증이 내 몸 안에서 일렁이고 있다.
타들어가듯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다. 내 몸 안에서 탈듯한 짜증이 만들어졌다. 순간 나를 집어삼키고 내 몸 밖으로 터져 나올 짜증을 그냥 두고 싶었다. 될 대로 되라지.
하지만 또 다른 마음은 어떻게든 기분을 바꾸어 보라고 권하고 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짜증에 희생양이 되게 하진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음이었다. 내 짜증에 다친 누군가에게 미안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러나 커져버린 짜증을 애쓰며 몸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원치 않는 일을 하다 체해버릴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갈까? 귀찮다.
잠을 잘까? 밤에 잠이 안 올까 봐 두렵다.
글을 쓸까? 생각이란 걸 하고 싶지 않다.
책을 읽을까? 책을 펼치니 글자들이 동글게 동글게 굴러다닌다.
무기력이다. 내 몸을 숙주로 엄청난 세력을 키워가는 무기력이다. 물먹은 목화솜을 내 몸에 걸쳐놓은 것만 갔다.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말이다. 휘청거렸다. 휘청대는 내가 싫어 그냥 앉아 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초콜릿을 필요로 하는 입맛만큼은 무기력에서 제외다. 나를 깨울 고 카페인이 필요하다.
아메리카노를 엑스트라스트롱으로 내렸다. 커피에서 쓴맛도 신맛도 강하게 났다. 커다란 거실 창가에 기대어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드니 가을이 무색할 정도로 진한 초록의 축구장이 보인다. 하늘색 조끼를 입은 또은 조끼를 입지 않은 어른 남자들이 공 주위로 뛰어다닌다. 저들은 지금 행복할까. 저렇게 뭔가에 정신없이 빠질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존중할까.
생각해보니 살면서 단 한 번도 무엇인가에 빠져본 적이 없다. 뭐든 적당히 발을 담그고 적당하게 발을 뺐었다. 하나에 미친 듯이 빠져보고도 싶었지만 난 선천적으로 뭔가에 미칠 수 없는 겁쟁이 었다. 때론 그런 내가 가여웠지만 내가 미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덜 아플 것이라는 오해였다. 사랑도 그랬다. 내게 사랑이란 먼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만 성사가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짝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마냥 신기했다.
무언가에 깊이 빠져본 사람들은 그것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다. 나는 하고 싶은 것 앞에서 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라면 할 수 없는 이유를 백가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할 수 없는 이유가 한 가지라면 해야 하는 이유를 백가지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분명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클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직진할 수 있는 거다.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에 마음의 소리를 듣고 해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아니 해야 하는 이유가 내가 되는 것이다.
비록 자존감이 바닥이 났지만 난 휘청거리며 냉장고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다행이다. 휘청이지만 움직인다는 것은. 맛있는 초콜릿이 먹고 싶다는 것은 내가 아직은 괜찮다는 증거다. 무기력을 커다란 한 덩어리에서 작은 덩어리로 쪼개고 있다는 증거다.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역시 초콜릿은 커피와 함께 먹을 때 제일 맛있다. 초콜릿을 먹는다고 짜증을 잠재울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비록 자존감이 되진 않을지라도 지금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때문에 저녁엔 칼로리가 낮은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