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 Oct 11. 2020

화살기도

‘저분의 눈이 되어주세요. 살아가야 하는 희망의 빛을 보여주세요. 저분이 오늘도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화살기도를 쏘아 올린다.    

길을 가다가 외형적으로 아픈 사람을 보았나. 긴 폴대를 톡톡이며 이정표를 보듯이 걷는 시각장애인을 보았을 때 특히 횡단보도 앞에서의 위험천만함과 안전의 경계를 넘을 듯 말듯한 발끝이 못 미더워 길을 다 건널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폐휴지 더미를 인생의 무게처럼 덤덤히 싣고 끄는, 그래서 울퉁불퉁하게 두꺼워진 손톱만큼이나 고단했을 어르신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저 할머니의 하루 끝에 두 다리 쭉 펴고 등을 누일 수 있는 따뜻함을 허락해주세요’     


  뉴스에서 사회 기사를 접할 때면 입을 작게 오므리고 빠르게 쫑알대는 일이 더 많아진다. 라면을 끓이다 불이 나서 화염에 갇혀 생과 사를 오갔던 형제 기사는 차마 어떤 화살기도를 올려야 할지 나를 막막하게 했다. ‘그들의 상처가 씻은 듯 낫게 해 주세요.’는 어쩜 진정성도 없을뿐더러 그들의 고통에 비해 기도가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다시 부모품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같은 불행을 예견하는 기도도 드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형제의 과거를, 얄팍한 기후 변화에도 쉽게 아플 불에 댄 상처를, 성장하면서 키가 커져도 그만큼 늘어나지 못해 서로 당기는 살갗의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어루만져줄 수 있을지, 그 통증만큼 아팠을 형제의 마음을, 그래서 더욱 힘이 들 그들의 미래를 위해 어떤 기도를 올려야 할지 자꾸 막막해지는 난 기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른기도했다.      


  언제부터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떤 과학적 근거로 나와 사랑하는 신랑을 닮은 아기를 낳고 난 후부터였던 것 같다. 내 세계가 다른 커다란 우주로 확장되는 시기였다. 지구에서의 점으로 살다가 우주에서의 티끌로 새로 시작하게 되었을 때, 순간 중력이라는 것이 사라져 살아보지 않고는 많은 위험에 아직 대비할 수 조차 없었을 때. 엄마라는 이름의 쿵쾅대고 쿵쿵대고 콩콩대는 불안한 가슴에 기댄 아기의 가눌 수 없는 고개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안고 화살기도를 했었다. 사랑이 뭔지를 끊임없이 갈구하던 그때. 모성의 용기를 내게서 감지하지 못해서 슬픈 시기였다. 그 작고 하얀 솜털이 보송한 아가를 품에 안고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게 해 주세요’ ‘아이가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훌륭한 아이로 키우게 해 주세요’ ‘내가 지혜로운 엄마가 되게 해 주세요’ ‘세상의 부조리함으로부터 우리 부부가 아이를 현명하게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같은 기도를 새까맣고 동그란 포도알 같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습관처럼 되뇌었던 것 같다. 의식을 하고 어떤 기도를 해야겠다 마음먹기보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쫑알거릴 때가 더 많았다.  

   

  자려고 누워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도, 버스를 타고도, 길을 걷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도, 음식을 하면서도, 불쑥불쑥 마주하게 되는 불행에 대해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다 보면 우리 모두의 하루가 참으로 고단하게 느껴졌다.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다리를 저는 아저씨와 그의 어린 아들로 보이는 손님이 들어왔다. 입안에 밥알과 반찬을 가득 넣고 오물거리다 마주한 그분에 대해 ‘저분의 다리를 고쳐주시고, 저분께 다리만큼 고되지 않은 행복한 미래를 주세요.’하고 화살기도를 마쳤을 때였다.

불현듯 저 사람은 다리만 아픈 건데 아픈 다리로 인해 마음까지 고되게 본다는 게 나의 쓸데없는 자만심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량한 내 몸뚱이 하나만 보고 나보다 훨씬 강하고 풍성한 마음을 지녔을지도 모를 그분의 미래까지 속단했다 생각하니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화살기도는 그렇게 종종 어렵고 자주 부끄러운 일이 되기도 했다.      


   뉴스나 신문에서 의로운 사람을 보았을 때면 그분이 행복하길 바라는 기도도 올렸는데 어느 날은 저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 의로우면 어쩌지? 사실은 나쁜 사람이면 그런 사람은 행복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내 기도가 참 바보스럽다고 느끼기도 했었다.      


때로는 이런 기도도 올린다.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땐 ‘제발 저 사람 좀 잡아가 주세요. 이 땅에 발도 못 붙이게 해 주세요.’ 하고 그럼 어느 땐 이렇게 나쁜 기도도 받아주실까 하는 생각도 하는 것이다.


 내 오지랖이 특별히 화살기도 속에서만 발현된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분명한 건 화살기도는  내게 평안과 안도감을 가져다준다.  불확실한 내일에 대해. 당장 있을 불행에 대해.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해.      


  사람이면 누구나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 살아간다 한다. 내가 지금 편하다면 내 옆의 누군가는 혹은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는 지금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있진 않은지, 그러므로 우린 서로를 위하고 껴안아야 하는 건 아닐까. 어느 순간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가 될 나를 위해서라도 때론 바보스럽고 자주 부끄럽고, 막막해지는, 어려운 화살기도지만 오늘도 입을 오므리고 빠른 속도로 쏘아 보낸다.     


‘저 글 잘 써서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상처 받은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더불어 저도 위로받을 수 있는 훌륭한 작가 되게 해 주세요. 꼭이요.’ 자주 이런 사심 가득한 화살기도도 쏘아 올리며.

작가의 이전글 초콜릿이 먹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