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회사원은, 처음이에요.> 13화
해외에서 대학을 나온 한국인 청년이 국내의 기업을 들어가게 되면
다수가 ‘글로벌 직무’를 지원하거나 해당 부서로 배정이 된다.
대만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김현주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글로벌 핵심 인재 어쩌고 저쩌고, 글로벌 사업 역량 어쩌고 저쩌고
한국 회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글로벌’ 역량,
대체 ‘글로벌하다’라는 건 무엇일까?
콘텐츠/엔터 업계에서 ‘글로벌 부서’를 경험한 김현주에겐
신입사원부터 직장 생활을 그만두기 전까지
중국, 미국, 호주, 일본 등 다양한 국가로의 장, 단기 해외 출장 기회가 있었는데
몇 가지 내가 ‘직접’ 수행한 ‘글로벌 업무’ 경험을 나눠보고자 한다.
신입사원 직무 배치가 이루어진지 채 2달도 안된 시점,
중국에 출장을 간 리더님이 전화를 주셨다.
“네 선배님!"
“응, 현주야 두 가지 말할 게 있어. 첫 번째는 네가 여길 (합작 드라마 촬영 현장) 와야 할 것 같아,
두 번째는, 좀 빨리 와야 할 것 같다는 거야!”
“오… 넵넵..!”
그렇게 수요일에 연락받고, 일요일에 중국에 간 뒤
한중 합작 드라마 현장에서 모든 촬영이 끝날 때까지
막내 제작 PD 업무를 수행한 뒤 4개월이 지나서야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수행한 글로벌 업무는 무엇이었을까?
1. 모든 촬영 현장에 출근하며, 감독님 모니터 근처에 달라붙어 불편한 게 없으신지,
정서를 살피고 원활한 통역이 잘 이루어지는지 감수를 하는 것
2. 각종 스텝 선배님들의 이야기를 듣고, 선배 PD들한테 필요한 내용을 공유하며 개선하는 것.
이야기의 주제는 식사/도시락 반찬 이슈, 세탁기 고장 수리 이슈,
크리스마스/설날 때 해외에서 고생하는 스텝분들의 정서 케어 등 다양했다.
3. 두 국가의 스텝들이 협업하기 때문에, 중국 스태프들의 정서 역시 살피며
한국 스텝들과 상호 웃으며 일할 수 있도록 소통을 돕는 것.
이게, 해외사업팀 소속 김현주가 수행한 글로벌 업무였다.
이건 글로벌 업무였을까?
아니면 글로벌하게 일하는‘사람’을 보조하는 일에 더 가까웠을까?
매일 새벽, 부터 작은 봉고차에 몸을 싣고 현장을 가면
의자가 없어 바닥에 앉거나 어디 앉을 곳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열악한 화장실의 외부 로케이션이 예상되면 각오를 단단히 다졌고
추운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종일 야외 촬영을 했던 날도 있었다.
사안별 이슈의 중요도 가늠이 어려워,
제 때 공유하지 않거나 섣부르게 행동해 혼난 적도 많았다.
이렇게 신입사원 김현주는'회사원 밥벌이’의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지만
한편으론 월급과는 별개로 쌓이는 매일의 출장 일비 30$(4만 3천 원)을 모아
회사 근처 오피스텔의 보증금 500만 원 마련에 성공하며 출장의 개인적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김현주의 출장 모습은,
강산이 한번 바뀐 것처럼 많이 변화했을까?
촬영을 위한 출장과 달리
사업 제안/협업을 위한 비즈니스 미팅이 중심이 된 단기 출장 역시
밥벌이의 쓴맛을 내게 여전히 맛 보여 줬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본부장님, 실장님을 모시고 일본 출장을 갔다.
잦은 출장 횟수만큼, 성과에 대한 압박을 느꼈고
내색은 안 했지만 리더들만 모시고 가는 것에 부담감이 많았다.
내게 ‘출장 성과’란 대면하는 해외 파트너사와 ‘유의미한 다음 논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각자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정하고 수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 협업 이력이 없는 나라와 언어가 다른 조직이
각 국가별로 상이한 업계의 정책과 절차를 준수하며
합작의 합의점을 빠르게 도출해 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뢰를 쌓아갈 시간이 필요했지만 상호 기다림의 방식이 달랐으며 취약했다.
비교적 의사 결정 권한이 없는 주니어 연차 때의 출장은
보내니까 갔었고, 실무 선배가 동행을 자주 했었다.
하지만, 10년 차 경력자가 주요 리더를 모시고 가는 출장은
실무적 의사결정부터 통역, 사후 공유와 팔로우까지 모두 나의 일이었다.
쓰다보니 냉소적으로 나열한 것 같은데
실상 괜찮은 것도 있었다.
일정 중 하루쯤은 다 같이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고
부모님에게는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멋진 딸내미가 될 수 있었고
간혹 실무 동료가 함께하는 출장에선 리더 수행에 대한 부담감이 줄어서 더 편했고
일본의 맛있는 편의점 간식들을 동생과 친구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
큰 이슈 없이 무사히 귀국하는 비행기에선 그렇게 마음이 편안했고
금요일 늦은 밤 귀국하더라도,
다음 날이 주말이면 한숨 돌릴 수 있음에 충분히 감사했다.
그렇게 국내와 국외의 밥벌이 업무를 수행하며 얻은
넓은 시야와 다양한 자극들은 내게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원하는 일과 밥벌이는 뭘까? 계속 이대로 괜찮을까? 내게 일은 무엇일까?
그러다가 결국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결국 ‘밥벌이’의 본질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고 쩨쩨한 일에 일희일비하는 내 모습이 싫다가
이따금씩 월급의 안정감과 또 인센티브로 효녀가 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가
주변에 함께하는 이들의 존재에 그저 위안을 얻기도 하다가
또 한 번씩 인정을 받으며 성취와 보람을 느끼는 것.
혹시 나는 일에게 밀당을 당했었나?
감히 남친도 아닌 주제에…!
이제 사람과 연애하기 위해서라도
진짜 자신이 원하는 밥벌이를 향한 용기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았다.
남친도 아닌 일에게,
더 이상 휘둘릴 수는 없었으니까!
13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