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 회사원은, 처음이에요.> 1화
어릴 적 내 꿈은 한국판 <귀를 기울이면>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똥손이라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일에는 재주가 없었다.
대신 나에겐 재치있는 말주변과 사람을 모으는 재능이 있었다.
중학생 무렵
내 꿈은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프로듀서였다.
세계적인 무대에 서서 프리젠팅하며 막대한 투자금을 모아
감독님한테 ‘돈 걱정 없이 작품 만드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그렸다.
꿈을 다듬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 곳은
CJ ENM이라는 회사였다.
“저 회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팀에 가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대학생이던 나는 한국 콘텐츠 업계의 선두주자라는
대기업에 입사하면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로망을 가졌고
몸과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근질거렸다.
수시로 CJ에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 모든 공고를 체크했다.
온갖 합격 후기와 직무 소개 영상을 일과처럼 찾아봤다.
마침내 내가 원하던 직무가 열렸고,
화려한 스펙의 언니 오빠들과 다양한 토론 면젖ㅂ 후
인적성 검사를 거쳐 인턴에 합격.
최종 채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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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 내 인생 최고의 성취 경험은 CJ ENM이라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유에 대해선 나중에 더 상세히 논의하기로 하고.)
하지만, 그렇게나 절실히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를 입사하고 난 뒤,
나는 3년 10개월 후 퇴사해버렸다.
공채 입사자 기준 평균 만 3.5- 4년을 채우면 대리 진급이 가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2개월을 남기고 퇴사한 것이다.
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나는 대리가 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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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욕구의 시작은 이랬다.
입사 후 3년 차가 되어갈 무렵
‘동기들은 다 대리 다는데 난 못 달 것 같고,
그럼 정말 쪽팔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대리를 못 달 것 같은 논리와 근거가 무수하게 있었다.
1. 입사한 지 2년 만에 부서를 변경해서, 커리어가 반쪽이 되었다
(고 생각했다.)
2. 현재 팀에서 1인분 몫을 못 해내고 있다
(는 느낌이 들었다.)
3. 내 의지와는 무관했던 암 수술로 인한, 3개월간의 병가가 신경 쓰였다.
이하 생략.
나는 2년 차에 부서를 한번 이동했고
또 한 번의 팀 이동을 한 후에 병가까지 겹치게 되었다.
주변에 4년차를 향해가는 동기들은
한 팀에서 차곡차곡 실무 경력을 쌓아
어느샌가 각 팀에서 안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았다.
반면 나는 새로운 일들을 처음부터 제대로 배울 수 없었고,
그게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져 남의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자를 꿈꾸던 나는 어디로 가고.
어느샌가 일과의 목표가 ‘혼나지 않는 것’이 되어 있었다.
28살이나 된 성인이 매일 생각하는 게 '혼나지 않는 것’이라니.
‘난 왜 이렇게 일을 못할까?’만 생각했던 그 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면
정말 짠하고 불쌍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나는 정말 슬펐다.
‘마음이 확고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립이 가까운 나이에,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힘차게 살아내기는커녕
기분은 오락가락하고.
‘퇴근’만 기다려지는 게 마치
내 하루를 부정하는 나날의 연속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입사한 지 반년 만에, 회사에는 장편 애니메이션 팀이 없어졌고
난 드라마 일을 하다가, 어쩌다 마케팅팀을 거쳐 신사업 TF의 일을 하고 있었고
인턴 시절을 보낸 투니버스에 다시 가고 싶었지만, TO는 나지 않았다.
웃긴 일이었다.
대학 내내, 최소 4년 동안 입사를 갈망한 회사를
입사한 지 3년 만에, 내 마음에서 떠나보낸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회사에 다닌다는 것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CJ에서 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에 간절했던 거였지,
CJ가 대기업이라서 가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첫 번째,
그리고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두 번째이며
그 수단과 방법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내 첫 번째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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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토요일, 일요일
꿀 같은 주말.
나는 새로운 출근을 시작했다.
아침밥만 먹고 후다닥 노트북을 들고 카페로 나갔다.
내가 하고 싶은 직무와 가고 싶은 회사가 있는지
각 기업 채용 사이트와 구직 사이트를 들락날락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당시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말에 주어진 자유시간이 5시간 있었다면
30분은 ‘CJ 퇴사하고 뭐 먹고사냐’로 고민했고
나머지는 네이버북스(현 네이버 시리즈)와 카카오페이지를 넘나들며
내 취향에 맞는 ‘로맨스 소설’을 계속 읽었다.
<귀를 기울이면>을 계속 재생했던 것처럼.
그리고, 발견했다.
네이버웹툰의 ‘경력직 채용 공고’를.
마감 D-3일 전이었다.
2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