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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elyn H Jan 09. 2024

처음, 그 찬란한 실패.

괜찮아요. 몇 번만 더 하면 되니까요.

직장인분들, 생애 첫 출근일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모두가 IMF를 힘겹게 지나던 때, 운 좋게 입사가 확정되어 겨우 제 몫을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조그만 배지를 가슴에 달고, 또각대는 하이힐을 신고, 거대한 로비로 들어선 그날 아침을 아직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흡사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뭐라도 된 듯한 기분 좋은 착각과 풋내나는 열정, 순진한 패기가 한데 뒤섞인 요동치는 순간이었지요. 


업무의 특성상 유난히 영어를 많이 쓰는 통에 살짝 위축되기도 했고, 전문 용어가 난무하다보니 모국어냐 외국어냐를 떠나 모든 것이 그저 외계어였습니다. 그래도 처음이라 새롭고 즐거운 마음이 더 컸었네요. 

다행히 상사분들도 꽤 인내심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제 미숙함으로 인한 불편을 견뎌 주셨으니까요. 

게다가 '팀 막내'라는 타이틀을 달았기에, 분에 넘치는 배려와 관심을 받기도 했구요.


아가의 첫 걸음마는 정말 사랑스럽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뒤뚱거리다 넘어지고 다시 혼자 일어나는 과정의 반복이 있어야만 합니다. 

안쓰러운 마음에 자꾸만 손을 잡아 주어선 안되지요. 아가 나름의 고군분투하는 시간이 충분해야, 비로소 한 사람으로서 제때 제대로 걸을 수 있으니까요. 

저 역시 처음은 마냥 행복했지만, 신입이라는 꼬리를 떼면서 차츰 혹독한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역량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이제와 보니 그 시간은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잔치는 금방 끝났다!

입사 2년차. 이젠 일이 제법 손에 익고, 팀에서도 잘 (폐 끼치지 않고)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평화롭던 어느 날, 부장님께서 자료 하나 주시며 “OO씨도 이제 이런 일을 할 때가 되었지. 한 번 해봐.”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 걸음마 겨우 떼었더니, 왠 장애물 넘기?’ 같은 느낌이었어요.  

능력은 부족한데 자존심만 쓸데 없이 넘치던 때라, 선배님들께 가이드나 조언을 전혀 구하지 않은 채 어깨너머로 배운 얄팍한 지식을 총동원해서, 주말까지 반납하고 긴긴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메일을 보내 드리고 커피 마시고 있는데, 채 10분도 안되어 부르셨습니다. 

"이게 뭐야? OO씨, 누가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요약을 하래. 이 긴 걸 누구더러 다 읽으라는거야."

"네?" 

"A대리나, B과장에게 물어보던가. 못 하겠어? 그럼 빨리 이야기해.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아...네, 죄송합니다."


솔직히 그 때의 어린 나는 억울하고, 억울하고, 또 억울하기만 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일을 쉬지도 않고 열심히 했는데, 알아주기는 커녕 혼만 났으니까요.

내상 입은 마음을 겨우 부여잡고, 화장실 마지막 칸으로 들어가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창피하고 수치스럽고 앞으로 어떻게 회사 생활을 계속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결국 이렇게 도태되어 버리고 마는 걸까, 걱정도 되면서 스스로 한심하기도 했구요. 아무튼 정말 극도로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한참만에 자리로 돌아오니, A대리님이 메일을 한 통 저에게 보내셨습니다.

'OO씨가 만든 자료 보니, 고생 많이 했겠구나 싶네요. 그런데 부장님께서 일단 저도 같이 보라고 하시니, 자료들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의 짧고 간결한 메일.

미처 회복이 안된 저는, 그마저도 고까운 마음에 별 말 없이 자료를 넘기며 무미건조하게 회신 했습니다. 뭔가 배울 기회 1회차를 고스란히 날렸던 사건이었습니다. 참으로, 못난이었네요. 


첫 사회 생활은 누구든 어렵기 마련이니, 혼자만 억울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갑자기 단박에 해결해 줄 구세주가 나타나거나, 없던 일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지 마세요.  

'역시 사회 생활은 녹록치 않은 것이구나' 라든가 '돈을 번다는 건 괴로움의 연속인가' 와 같은 쓸데 없는 자기 연민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다고 누구 하나 그 일을 대신 해주지 않으니까요.  


제 경험상, 본인의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기본 옵션으로 장착하고, 가급적 빠르게 준비 태세에 돌입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합니다. 

사실 준비란 게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저 또 깨지고 넘어져도 개의치 않고 다시 일어나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와 같은 마음가짐 정도랄까요. 더불어 누구에게든 배우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겸손함이 부가 옵션이면 금상첨화겠구요. 어려운가요?


그 이후, 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훗.

이전 02화 일, 일단 정의부터 하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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