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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elyn H Feb 06. 2024

농업적 근면성을 許하라.

아참,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났다면서요?

여러분, 혹시 ‘농사달력’ 보신 적 있나요?


언젠가 어느 지방의 작은 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점심 식사하러 들어간 동네 밥집 카운터 뒤에 무심히 걸려 있는 달력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24절기를 기준으로 매달 심어야 할 작물과 해야 할 일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어요. 마치 길잡이가 되는 여행 가이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농사는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와 날씨에 좌우되고, 그에 따라 세심한 작업들이 시간순으로 차근차근 이어지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역시나 달력을 보니 실감이 되었어요.


가끔 직장에선 ‘왜 농업적 근면성을 요구하는 거야?’와 같은 불평 아닌 불평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야근, 근태 관리 등 편치 않은 요인들로 인한 불만과 빈정거림이 반반 섞인 것인지라, 말한 이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워라벨이 목숨만큼 중요해진 시대에, 당장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의미마저 없는 일을 더 해야 한다면 가끔은 부아가 치밀거나 억울하겠지요.


52시간제가 시행되기 전까지, 출퇴근 시간은 부서장의 라이프스타일과 인품에 달려 있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저에겐 느긋하거나 관대한 상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1차 상사는 2차 상사에 종속되어 있기에, 늘 상사의 상사가 출근하기 최소 10분 전 도착해야 했고, 퇴근도 그들이 먼저 떠난 후에야 가능한 것이었지요. (상사의 상사는 예외 없이 일찍 오시고, 대부분은 늦게 퇴근하시더군요)

생각해보면, 당시의 노동시간이 훨씬 더 긴 편이었는데, 누구도 딱히 ‘농업적 근면성’에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장 시대의 필연이었든 가스라이팅을 통한 조직 문화였든 뭐였든 간에 말이죠. 


언제부턴가 ‘농업적 근면성’이 과연 정말 나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직종/직업 비하 의도가 전혀 없는 농담같은 이야기인데도 은근히 농업 종사자 분들께 알 수 없는 미안한 마음이 생겼어요. 그분들의 한결같은 근면성 덕분에 점심도 저녁도 맛있게 먹는 것인데 말이죠.

저는 농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파종부터 수확까지 많은 인력이 시간과 에너지를 상당히 쏟아야 하는 일이라는 기본 개념은 있습니다. 

‘1년 농사’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결코 하루 이틀에 해치울 수 있는 일은 아니지요. 절기마다 계절마다 해야 할 일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서 차근차근 하나씩 사람들과 힘을 합쳐 땀을 흘리며 해내야, 제 때에 추수할 수 있습니다.

 


어떠세요. 우리가 직장에서 하는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요?

연초가 되면 사업 전략을 점검하고 부서마다 KPI를 수립하며,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들이 연간 베이스로 월별, 분기별로 나뉘어집니다. 1년을 충실히 보낸 조직이 경영목표를 달성하고, 그 구성원들은 연말에 연봉인상, 인센티브, 승진 등의 아름다운 ‘추수’를 하게 되겠지요. 


아무리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혹은 AI가 우리의 삶에 깊숙이 파고 들 것이라는 예측과 전망이 지배적이라도, 아직까지는 일을 ‘되게’ 하려면 어쩔 수 없이 농업적 근면성이 필요할 것 같네요.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일을 고민하고,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고, 함께 방법을 찾고 실행하는 것. 

이러한 모든 과정이 절기와 계절을 지나며 매해 무한 반복되는데, 이것이 바로 다름아닌 ‘직장인의 근면성’일 겁니다. 동의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직장인 달력'에 맞춰 일을 하고 있고요. 


누구보다 '될 일'을 하고 싶은 저로서는, 제 나름의 근면성의 미덕을 추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일의 근면성’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느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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