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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와레몬나무 Sep 28. 2019

걸어야 사는 사람들

암환자로 등록된 날 딸아이는 방 한 구석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죽이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졌다. 암환자카페에 가입하고 글을 읽으니 나는 문제거리도 아니었다.  암수술을 앞두고 종양크기를 줄이기 위해 방사선을 받고 있는 환자, 병원에서는 더이상 손 쓸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 오늘 내일 사경을 헤매는 환자옆을 지키는 보호자의 심정 등을 읽노라니 나는 그나마 종양도 크지않고 별다른 처치없이 당장 수술을 할 수 있는 것만해도 다행이었다. 가끔씩 완치판정(암환자도 등록된 날부터 5년 동안 재발이나 전이가 없는 경우를 일컫는 말)을 받은 선배들이 수기를 올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O Porto 와이너리가 밀집한 Gaia 지구

그들은 한결같이 걷기를 하는사람들이었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 는 것은 암환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명언이다. 나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바로 전년도에 포르투에서 산티아고까지 걸은 카미노 경험에서 걷기의 묘미를 느꼈다. 나는 그때 오빠가 사는 사천에 있었는데 아파트만 나가면 사방이 논밭과수원이었다. 싱그러운 초록색 벼가 자라는 논이 끝나는 곳에는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동네산이 보였다. 

그러나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걷기는 자신감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잦은 배변과 실금은 밖에서 10분 이상 걷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하루도 견디기 힘든데 5년을 버티면서 "완치"라는 성과를 이뤄낸 선배암환자들의 조언을 무시할 수 없고, 나의 의지도 그대로 꺽고 방에 누워서 병원가는 날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잦은 배변은 식사시간을 조절하여 산책시간 즈음에는 공복에 나갔더니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문제는 실금이었다. 혹시라도 방심하는 사이에 실수라도 할까봐 생리대를 하고 걸었더니 마음이 놓였다.

 걷는 시간은 10분에서 20분 나중에 40분까지 늘어났다.  40분 동안 걷는다고 해서 내내 걸을 수는 없고, 힘에 부칠때는 마을 정자에 앉아서 쉬었다. 전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거라고 하던 배변은 나을 기미가 없었다. 1시간도 채 걷지 못하는데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지, 지금은 어떻게라도 낫기위해서 기를쓰고 하지만 나중에는 의지가 약해지지 않을지 걱정되었다. 슬슬 꾀가 나기 시작했다.

오빠가 눈치챘는지 출근할 때 같이 나가자고 했다. 오빠는 10여년 넘게 회사 출퇴근을 걸어서 다녔다. 비가 오는 날을 빼고 오빠는 늘 걸어 다녔다. 나의 산책코스는 오빠가 출근하는 길이기 때문에 같이 갈 수 있었다. 오빠는 뜬금없이 "세상에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이 누군지아니?"라고 물었다. 

"조기축구회 사람들"

"어? 맞네! 그사람들 말고는?"

"글쎄......"

"산에가는 사람들도 그래. 산에 오는 사람들보면 건강한 사람보다 아픈 사람들이 더 많아. 우리 산악회도 보면 크고 작은 병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반은 넘을거야. 어떤 사람은 허리디스크여서 못 걷는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산밑에서 왔다갔다하더니 이제는 정상까지 거뜬히 올라가. 아팠던 사람들은 걷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알기때문에 비가오나 눈이오나 거는거야."

그러고보니 오빠도 당뇨가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요즈음은 병원에서도 환자들에게 걷기를 많이 권유한다. 막 수술을 마치고 병실에 있을 때, 환자들은 몸에 2-3개씩 호스를 연결하고, 링거까지 달고 있기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다. 그래서 침상에 누워있으면 간호사들은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을 권유한다. 걷기는 장기가 제자리를 찾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걷기는 치병의 중요한 요소였다. 

 순간에 포기할 고비가 있었지만 오빠와 걸은 뒤로 걷기에 다시 탄력이 붙었다. 힘들때일수록 사천벌판으로 나와 걸었다. 한여름에 길쭉길쭉하게 자라는 벼와 그 위를 날으는 백로는 마치 대서양의 초록빛 바다와 끼룩끼룩 우는 물새같았다.  

 시골집 담장에 피어있는 채송화와 복숭화, 나팔꽃, 해바라기, 자주괭이밥이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어찌보면 연약한 꽃들에게 과하다 싶을 빛이지만 묵묵히 버티는 꽃들이 나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주는것 같았다. 

걷기는 포르투갈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낮에는 집주위를 걷고, 저녁 에는 성당에 걸어가는 것으로 대신했다. 암환자로 등록되고 입원과 수술 그리고 방사선 치료를 할때는 내가 다시 햇빛아래서 걸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지못했다. 또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아들이 떠난뒤 우리는 얼굴을 마주한 적도, 살가운 얘기로 웃어본 적도 없었다. 자식잃은 부모는 그러면 안되는 줄 알았다.

  나는 주말에는남편 손을 잡고 시장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카페에 들르곤 했는데 그것은 또 다른 행복이었다. 얼마나 바라던가! 병실에 있을 때는 이런 날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남편은 걷기를 싫어하지만 그래도 걸어야 하는 나를 위해서 노력했다. 가끔씩 도심을 벗어나서 포르투갈의 소도시, 파멜라(Pamela), 세심브라(Sessimbra), 아제이타옹(Azeitão)의 산, 해안, 포도밭을 걸었다. 전에는 알지못했던 포르투갈의 시골마을을 알아가면서 나는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다. 

 이왕 벌어진 일에 대해서 미련을 두기보다는 해결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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