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와레몬나무 Oct 02. 2019

카미노 산티아고 포르투갈

              

 카미노 산티아고 포르투갈(Caminho Santiago Português, 이하 카미노 포르투갈)은 포르투갈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다.  카민요(Caminho포르투갈어), 카미노(Camino,스페인어)는 길이라는 뜻이며, 유럽 곳곳에서 스페인 갈리시아에 있는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로 가는 길이 많다.  

 갈리시아는 이베리아 반도의 가장 북쪽 도시이며, 반도의 남쪽  포르투갈에서 북쪽으로 걸으면 산티아고에 이른다. 때로는 이베리아 반도를 흐르는 테주(Rio Tejo, 스페인에서는 타호강)을 따라 걷고 산간내륙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대서양의 초록색 물줄기와 세찬 바람,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걷는다.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 별이 모이는 티아구(Tiago) 성인의 길, 그곳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포르투갈과 스페인어로 티아구)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예루살렘과 로마와 함께 세계 3대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산티아고로가는 순례자들은 조가비를 가방에 달고 다닌다.



산티아고를 부를때 "성지" 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지만 화려한 치장이 없을때부터 그곳은 천년이 넘는동안 수많은 고행자들의 수행길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부르는 길이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을 순례자, 페레그리노(Peregrino, 남자)혹은 페레그리나(Peregrina, 여자)라고 부른다. 

 카미노 포르투갈 길은 12세기 중엽 포르투갈 북쪽에서 시작된 "레콩키스타"(reconquista재정복 혹은 국권탈환)운동과 겹친다. 레콩키스타는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온 무슬림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것인데 우리식으로 말하면 국권회복운동쯤 될 것 같다. 포르투갈의 북쪽에서 시작(868년)하여 최남단 알가르브(1249년)에서 이슬람교도들을 마지막으로 몰아내는데, 이때 왕에 의해 직접 감행되지 않고 대부분 산티아고 기사단 등의 원정대에 의해 행해졌다. 



 


포르투갈 왕은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직접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섰다. 14세기에 이사벨여왕은 리스본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으며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후에는 자신의 왕관을 산티아고 제단에 바쳤다. 1502년 마뉴엘 1세는 산티아고 시계주위에 등을 켰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19세기경 당시 유럽국가와 나폴레옹의 갈등으로 포르투갈 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미노 포르투갈은 여러가지로 특이하다. 대부분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노란색 화살표이지만 스본에서 출발하는 길은 갈은 파란색 화살표가 1개 더 있다. 파란색 화살표는 포르투갈의 성지, 파티마(Fátima)로 가는 길이다. 2개의 화살표는 포르투갈 중부도시 산타렝(Santarém)에서 갈라진다. 



 


뿐만 아니라 한 나라에 카미노길이 1개 있는데, 카미노 포르투갈은 북쪽도시 포르투(Porto)부터 내륙길(Caminho Central)과 해안길(Caminho Costal), 산간마을 내륙길(Caminho Inteiral)로 나뉜다. 카미노 포르투갈은 순례자의 기호와 짧은 시간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다. 

 나의 첫 카미노는 포르투(O Porto)에서 산티아고까지 270km였다. 를 13일 동안 걸었다. 함께 걸은 일행이 있었지만 혼자 걷는 것과 다름없었다. 순례자의 체중 10 퍼센트에 달하는(혹은 그 이상)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은 상당히 힘들기 때문에 말을 하면서 걷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과 같아서 "봉 카민요!(Bom Caminho)" 혹은 "본디아!(Bom dia)"인사정도만 하고 묵묵히 걷는다. 오체투지는 아니지만 묵언수행과 같았다.





함께 걷지만 혼자인듯한 길에서 비로소 나는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서러움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봇물처럼 터지고, 나는 왜 이 길을 걸으려고 했는지, 상실감을 안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분명히 집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이토록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찾기위해 골똘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카미노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추억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이 여행했던 곳, 코잉브라가(Coimbraga), 코잉브라(Coimbra), 포르투(Porto), 브라가(Braga), 기마랑에스(Guimarães) 등 을 지날때는 미소와 회한이 오버랩되었다. 

 추억속의 아이는 늘 행복하고 즐거운 개구장이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비록 성당앞 필로리(pilori)를 지날때에는 그곳에 내가 묶여야 하는 것이 아닌지 자책하기도 했지만 추억속에 있는 그의 환한 미소만으로 상실감은 조금씩 퇴색되는 것 같았다. 


 



돌아보면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포르투갈을 알은지 17년만에 리스본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종교적인 의미와 무관하게 무작정 길을 나섰다. 오직 나를 모르는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 길을 걸었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지만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많았다!'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 눈시울이 화끈거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무엇때문에 길을 나섰는지, 육체적인 안락함을 뒤로하고 몇십명씩 한 방에 자는 알베르그에서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고, 소박한 식사에 만족하고 포만감을 느꼈는지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곧 순례자 미사가 시작될 터였다. 나는 순례자들의 틈을 비집고 고해소를 찾았다.

이국의 성직자에게 무엇이라도 고백하고 싶었지만 즉흥적인 무신자의 호기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모든 고해소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성당의 허공을 휘젖는 향로와 그것이 내뿜는 그윽한 향은 그동안 나의 시간을 보듬어주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수술을 받고나서 졸업을 앞둔 딸아이와 함께 걸었다. 딸아이의 전공이 호텔경영학이고 좋다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더라도 "어서 오십시오"라고 모셔가는 호텔은 없었다. 20대의 취업난이 딸아이도 겪고 불안하던 시기였다. 걷는 것이라면 평소에 집 앞에 있는 슈퍼도 가지 않던 아이지만, 나의 첫 순례길의 예행연습을 같이 했던 동지로서 함께 걷자고 구슬렀다. 나는 딸아이가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느끼기를 바랐다. 

 보드라운 흙길과 아스팔트, 빗물로 진흙탕이 되거나 발자국까지 그대로 말라버린 길, 오르막과 내리막이 우리들 인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길이 지겹다고 하루에 많이 걸을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안달한다고 가야할 길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야 목적지에 도착하듯이 자기 길을 찾을 수 있음을!





직장생활을 하는 어느날, 스스로 어떤 마을을 얼마나 걸을지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한 경험이 힘이 되기를 바랐다. 나의 첫 카미노의 강렬한 느낌을 딸애도 느끼기를 바랬다.

 그러나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 날 나의 바램과 딸애의 기대는 이룰수 없었다. "별이 모이는 들판", 콤포스텔라는 세상의 비가 모두 이곳으로 모인것처럼 비가 내리고, 거무튀튀한 대성당은 성스럽기 보다는 음산했다. 공사중인 한쪽 귀퉁이는 푸른 천막때문에 더 흉물같았다. 분명히 미리 도착한 순례자들이 있을텐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하는 순간 뒤에서 허탈한 소리가 들렸다.

"엄마! 이게 다야?"

"그러게. 우리가 함께 여기 온거야."라며 동문서답을 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뒤, 딸아이는 "엄마, 이상하게 가끔씩 산티아고 순례길 걸었던게 생각나. 언제 다시 갈 수 있을까?"





딸아이만 변한것이 아니었다. 나도 조금씩 변화고 있었다. 남편과 딸애를 대하는 것이 편해지고 한국에 있는 모친께 가끔 안부라도 묻고, 조금씩 친구들 가까이에 가고, 스스로 성당을 찾아가서 아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아침 눈을 뜨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걸을 수 있고, 내 가족들이 이만큼 버티고 있는것을 고마워했다.

 포르투갈에서 한국으로 귀국하고 1년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다시 카미노 포르투갈이 생각났다. 가보지 않은 길은 늘 미련이 남는다. 나는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포르투에서 해안길을 걸었다. 내륙길은 국경도시  발렌싸(Valença)에서 민요(Minho, 혹은 Mino미노)다리를 건너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데 해안도시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카민야(Caminha)에서 배를 타고 스페인령 아구아르다(A Guarda)로 갔다. 



파드론(Padrón)에서 테오 (Téo)로 가는길

 


이전의 두번의 걸음과 달리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포르투갈 길은 다시 걷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비구(Vigo)를 지나 르돈델라(Redondela)에 이르자 내륙길과 만났다. 카미노포르투갈은 모든것이 만나는 길이다. 때로는 국경으로 나뉘어진 나라의 사람들이 양국을 오가며 만나고, 인종과 국적이 다른 세계에서 온 카미노를 만나고, 길과 길이 만난다. 

이베리아 반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은  이쪽 저쪽에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산티아고 드 콤포스텔라처럼 한 곳에서 만나는 길이었다.  


뱀꼬리: 다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는데 그 길은 이상하게 자꾸 부르는 것 같아서 나는 2019년 독일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길을 걸었다. 그럼으로써 나는 6여년 동안 산티아고 순레길 포르투갈 길을 6번을 갔다. 아직은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길이 대중적이지 않아서 나의 경험은 블로그에 썼는데 그 길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서 새로운 곳에서 보람을 느낀다.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의 모든 것은 아래 링크로

 https://blog.naver.com/byleekim2/221801749376














이전 17화 걸어야 사는 사람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